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달력의 마지막 장이 낙엽의 신세가 되어 초라하게 달려 있다. 설경(雪景)이 그려져 있다. 오늘밤쯤 혹시 눈이 오려나, 날이 침침하다.
막연히 눈을 기다려 본다. 세월 가는 소리라도 듣자는 걸까? 올 1년은 산 것 같지도 않고 잃어버린 것 같다. 실물(失物)을 한 허망함과 억울함. 그러나 신고할 곳은 없다.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175p)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마치 거창한 일이라도 하는 양 준비 작업이 길다. 날이 갈수록 점점 길어지고 있다. 글 쓰는 게 두려워진 탓이다. 부족한 글 실력을 붙잡고 전전긍긍할 시간을 되도록 늦게 맞이하고 싶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글이 잘 써졌다. 아마 내가 여느 소설 속 주인공처럼 수많은 사건 속에서 보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어느 것도 벌어지지 않는 잔잔한 일상의 연속이다. 이제는 평온한 나날에 익숙해져 폭풍 같았던 시간도 산들바람처럼 떠올라 복원이 영 힘들다.
어제는 몇 줄 쓰지도 않았는데, 눈앞에 어지러이 놓인 메모들이 자꾸만 거슬려서 치우다가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누런 서류봉투 안에 정성스레 포장된 달력을 발견했더랬다. 작년 말 준수 형이 직접 만든 달력. 형의 평소 솜씨도 알고 있고 샘플로 보여준 사진도 예뻐 주변에 선물하려고 많이 샀었는데 미처 다 나눠주지 못하고 남은 거였다. 봉투에서 달력을 꺼냈다. 먼지가 하나도 묻지 않은 깨끗한 달력의 첫 장은 아직 1월이다. 어느 새 11월이 코앞이다.
‘지난 1년의 5/6을 난 어떻게 보낸 것일까?’
‘퇴원 후 4월부터 지금까지 반 년 동안 난 무얼 했지?’
반성을 시간을 가져본다. 긴 시간동안 하고자 했던 것들이 참 많았는데, 다 할 줄 알았는데 지킨 게 없다.
몸무게도 그대로고 한의학공부도 영 소홀했다. 지(智), 덕(德), 체(體)를 모두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겠다는 다짐은 바닥을 잠시 뒤덮던 올가을 낙엽처럼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사람 참 쉽게 안 변한다. 어쩔 수 없는 천성인가 보다. 나의 거창한 계획을 들은 준수 형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1/3만 읽어도 성공이라고, 불가능한 계획이라고 했는데, 1/3은커녕 1/10도 안 읽었다.
‘형 말이 맞았네. 내년까지 기간을 연장시키면 할 수 있을까?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동안 발목 잡던 음치도 어느 정도 탈출했다. 조만간 성당 교리반도 끝나고 세례도 받는다. 생전 처음으로 가족 여행도 했고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느낄 기회를 많이 가졌다.
무언가 잔뜩 잃어버린 것 같은 허망함도 들고,
무언가 잔뜩 얻은 것 같은 충만함도 든다.
모순된 감정은 아니리라. 잔뜩 잃고 그만큼 또 얻었다. 가지 못한 길이 더 아름다워 보이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못난 심보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거래였다고 자부한다. 이제는 이 거래가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