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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31 책에서 위로 받다. Ⅳ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31 책에서 위로 받다. Ⅳ






《봄에의 열망》

 

달력의 마지막 장이 낙엽의 신세가 되어 초라하게 달려 있다. 설경(雪景)이 그려져 있다. 오늘밤쯤 혹시 눈이 오려나, 날이 침침하다.

 막연히 눈을 기다려 본다. 세월 가는 소리라도 듣자는 걸까? 올 1년은 산 것 같지도 않고 잃어버린 것 같다. 실물(失物)을 한 허망함과 억울함. 그러나 신고할 곳은 없다.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175p)




- 올 한 해를 돌아본다. -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마치 거창한 일이라도 하는 양 준비 작업이 길다. 날이 갈수록 점점 길어지고 있다. 글 쓰는 게 두려워진 탓이다. 부족한 글 실력을 붙잡고 전전긍긍할 시간을 되도록 늦게 맞이하고 싶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글이 잘 써졌다. 아마 내가 여느 소설 속 주인공처럼 수많은 사건 속에서 보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어느 것도 벌어지지 않는 잔잔한 일상의 연속이다. 이제는 평온한 나날에 익숙해져 폭풍 같았던 시간도 산들바람처럼 떠올라 복원이 영 힘들다.


 어제는 몇 줄 쓰지도 않았는데, 눈앞에 어지러이 놓인 메모들이 자꾸만 거슬려서 치우다가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누런 서류봉투 안에 정성스레 포장된 달력을 발견했더랬다. 작년 말 준수 형이 직접 만든 달력. 형의 평소 솜씨도 알고 있고 샘플로 보여준 사진도 예뻐 주변에 선물하려고 많이 샀었는데 미처 다 나눠주지 못하고 남은 거였다. 봉투에서 달력을 꺼냈다. 먼지가 하나도 묻지 않은 깨끗한 달력의 첫 장은 아직 1월이다. 어느 새 11월이 코앞이다.


 ‘지난 1년의 5/6을 난 어떻게 보낸 것일까?’

 ‘퇴원 후 4월부터 지금까지 반 년 동안 난 무얼 했지?’


 반성을 시간을 가져본다. 긴 시간동안 하고자 했던 것들이 참 많았는데, 다 할 줄 알았는데 지킨 게 없다.



 몸무게도 그대로고 한의학공부도 영 소홀했다. 지(智), 덕(德), 체(體)를 모두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겠다는 다짐은 바닥을 잠시 뒤덮던 올가을 낙엽처럼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사람 참 쉽게 안 변한다. 어쩔 수 없는 천성인가 보다. 나의 거창한 계획을 들은 준수 형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1/3만 읽어도 성공이라고, 불가능한 계획이라고 했는데, 1/3은커녕 1/10도 안 읽었다.


 ‘형 말이 맞았네. 내년까지 기간을 연장시키면 할 수 있을까?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동안 발목 잡던 음치도 어느 정도 탈출했다. 조만간 성당 교리반도 끝나고 세례도 받는다. 생전 처음으로 가족 여행도 했고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느낄 기회를 많이 가졌다.


무언가 잔뜩 잃어버린 것 같은 허망함도 들고,
무언가 잔뜩 얻은 것 같은 충만함도 든다.


 모순된 감정은 아니리라. 잔뜩 잃고 그만큼 또 얻었다. 가지 못한 길이 더 아름다워 보이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못난 심보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거래였다고 자부한다. 이제는 이 거래가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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