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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32 책에서 위로 받다.Ⅴ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32 책에서 위로 받다.Ⅴ





《봄에의 열망》


 긴긴 겨울밤 올해도 얼마 안 남았구나 싶으니 이런 일 저런 일을 돌이켜보게 되고 후회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시시한 후회 끝에 마지막 남은 후회는 왜 이 어려운 세상에 아이들을 낳아 주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후회가 된다. 그리고 황급히 내 마지막 후회를 뉘우친다. 후회를 후회한다고나 할까.

 아아, 어서 봄이나 왔으면. 채 겨울이 깊기도 전에 봄에의 열망으로 불안의 밤을 보낸다.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177p)




- 처음 기다려보는 겨울 -


 나는 겨울을 기다린 적이 없다. 좀더 늦게 오기를 빌었으면 모를까. 선물이 잔뜩 들어오는 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세뱃돈으로 지갑이 두둑해지던 설날, 그리고 길고 긴 방학까지. 기분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에게 겨울은 너무 추운 계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태음인(太陰人)의 생리 및 병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간대폐소(肝大肺小)’이다. 간 기능계는 항진된 경향을, 폐 기능계는 저하된 경향을 띤다는 의미이다. 전형적인 태음인이었던 나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비동염과 삼출성 중이염이 심각하게 와 전신마취 수술을 2번이나 해야 했고, 그 뒤로도 만성기관지염을 비롯하여 폐렴, 천식까지 달고 살았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가 일찍 마치는 매주 수요일은 대학병원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건 5학년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생각이라는 걸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나이 그 이전부터 늘 수요일은 꼭 병원에 갔던 탓에 왜 가야하는지 의문조차 들지 않았더랬다. 그냥 무엇이든지 이기고 싶고 1등하고 싶어, 병원에만 가면 환자들을 부르러 나온 간호사의 품 안에 든 차트봉투 두께만 살폈더랬다.


이모, 이모. 간호사 선생님이 다섯 사람 부르는데,
내 꺼가 다른 애 4개 합친 거 보다 더 크다?
나 1등이야.
이겼다 그치?


 맞벌이하는 동생 내외를 대신하여 조카를 병원에 데려온 이모는 나의 이런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상황이 이러다 보니 찬바람만 불면 어머니는 나를 꽁꽁 싸매려 든 건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난 그게 괴로웠다.


옷이 주는 갑갑함과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熱氣).
마스크로 막지 못한 눈과 귀로 들이닥치는 한기(寒氣).


 조화되지 못한 음양(陰陽)의 불균형은 늘 나를 고통에 빠뜨렸다. 추위에 벌벌 떨다 집에 돌아와 겹겹이 쌓아올린 옷을 걷어내면 땀에 절은 속옷을 맞이하기 일쑤. 결국 난방이 되지 않는 화장실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샤워를 해야 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조금이라도 더 입히려는 어머니와 하나라도 덜 입으려는 나의 신경전이 외출 때마다 벌어졌다. 아니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특히 나는 목까지 덮는 터틀넥 부류의 옷 입기를 매우 꺼려하는 편인데 어릴 때 반강제적으로 입었던 목티가 주는 갑갑함이 다시 떠올라 목을 옥죄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통을 잔뜩 안겨주는 계절이기에, 겨울은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난 어느 때보다도, 아마도 평생 중에 가장 강렬히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이 되면 치료가 끝난다. 그 순간, 난 날아오르리라.


 자연을 거스르는 겨울의 우화(羽化)를 열렬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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