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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ullmoon Mar 22. 2022

인정, 인정, 인정

너의 요리사랑이 수학, 영어, 과학보다 강함을.

#인정

#인정

#인정

#너의열정집념의지


01

우리 딸은 요리에 진심이다. 

요리라고 하면 매번 “디저트에만”이라고 녀석은 바로 잡지만, 나는 늘 요리라고 말한다. 

어젠 매일 나와 하는 공부(라고 해 봐야 약 10분간 학교 수업 리마인드. 1교시부터 간략하게 요약해서 들려주기)에 딴지를 걸기에 결국 인내가 고갈되고 말았다.  


“알았어. 우리 일주일간 생각할 시간을 좀 갖자."

(너... 계속 그래. 얼른 반성 못해!!!라는 속내.)


녀석은 저 말에 움츠러들기는커녕, 기회라는 듯 표표히 거실로 사라졌다.

무얼 하나 슬쩍 보니 한참을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쓴다.


'그럼 그렇지, 그래야 내 딸이지. 생각해 보니 너무 했다 싶지?'

'사과편지를 쓰나? 수학 문제집 푸나?'


02

아이가 등교한 후, 노트북 옆에 살포시 놓인 종이를 '자발적 반성문'인 줄 알고 반갑게 들어 올리던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인정. 인정. 인정."


파르페/ 샤를로트/ 슈바르츠 벨더 키르쉬 토르테 / 타르트 타탕/ 브라반 더 슈니텐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일까? 아는 거라곤 파르페 하나.

어디서 저 말들을 수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나오면 내가 약해질 밖에.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항복. 우리 딸의 요리에 대한 사랑은 앞으로도 엄마의 수학, 영어, 과학... 등등 보다 늘 힘이 셀 거다.


03

만화책도 그랬다. 

나도 남편도 만화책을 좋아한다. 만화책 안에서 인생을 배우기도 했기에 만화책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문제는 너무나 심각하게 만화책만 본다는 것.


"이건 음식으로 치면 지나친 편식이라서 문제가 되는 거야."

"만화책에 심취한 후, 얘 그림 좀 봐. 너무 심하게 한쪽으로만 치우치고 있지?"


남편과 나는 아이의 만화책 편식을 바로잡고자 작정하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여보, 그냥 인정할까 봐. 내가 한눈파는 사이 신의 물방울(아니 그건 어디서 찾았나 몰라) 한 권을 다 본거 있지. 중요한 건 이거야. 뒤에서부터 읽어야 하는 줄 모르고 보통 책들처럼 앞장부터 읽은 거야. 다 읽고 나서  나한테 뭐랬는 줄 알아요? 


엄마, 이 작가는 정말 이상해. 사건들이 다 이상하게 해결이 돼. 해결은 되는데 순서가 엉망이야.


일곱 살짜리가 이야기 흐름도 안 맞는 그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어냈어. 세상에, 나라면 아무리 만화책이라도 중간에 덮었을 거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끝까지 보고 있어?!"


아무리 만화책이라도 거꾸로 읽어나간 그 힘에 나는 두 손을 들었다. 더 이상 이 아이를 만화책에서 떼어낼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만화책만 읽는 지독한 편식을 바로잡겠다는 의지,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남편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일간지 속 시사만화까지 섭렵하는 일곱 살의 집념에 남편 역시 항복하고 말았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만화책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면 차라리 다양한 주제, 다양한 그림체의 양질의 만화책을 공급하기로 결심했다.


04

주부로 14년 가까이 살아보니 요리는 정말 중하다. '어차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란 흔한 말속의 먹고는 정말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오늘부터 나는 아이의 요리에 대한 관심을 먹고사는 일(먹고 공부시키는 일)로 해석하기로 했다. 일단, 공선옥 작가의 <행복한 만찬>과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나나 키친>을 침대 옆에 놓아두었다. 녀석이 책을 안 읽으면 읽어주는 수밖에. 


'요리와 민족, 문화적 특성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있겠지? 아무렴 어떻게 없어.'


만화책의 세계를 헤매던 그때처럼 나는 딸 덕분에 또다시 공부를 할 듯. 요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융합(?)과 확장을 모색하게 될 것 같다. 그렇잖아도 할 것 많은 일상인데, 새로운 할 일이 혹처럼 붙었음에도 그저 웃음이 실실. 


야호! 맛난 건 많이 먹어야지. 딸 공부라는데, 딸바보 남편이 얼마나 팍팍 후원하겠어~~~ 

프랑스 음식은 프랑스 본토에서 먹어야 한다고 우겨야지. 그럼 프랑스도 가자 하겠지? 앗싸~~ 신난다.


+

문득 고등학생 때 아침을 먹는 내 옆에서 <이규태 칼럼>을 읽어주던 울 엄마가 생각났다. 

'그때 그 시절 엄마에겐 어떤 큰 그림이 있었던 걸까? 논술과외시켜달라는 내 말을 들어주지 못해 마음이 쓰여서였을까? 엄마는 왜 딸은 귀담아듣지도 않는 칼럼을. 신문 사설을 매일 읽어줬을까?'


"엄마 때문이야. 다 엄마 때문이야. 논술만 잡으면 가능성 있다고 했는데. 글 잘 쓰니까 조금만 연습하면 점수 잘 받을 수 있을 거라 했는데... 엄마가 논술 그룹과외만 시켜줬어도, 가군에 합격했을 거야!" 


나의 낙방을 전적으로 엄마 탓으로 돌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눈물이 핑. 

얼마나 억울했을까 울 엄마. 매일 신문 읽어주고, 칼럼 오려 스크랩해 주던 그 노력과 정성 이야기하지, 왜 암말도 안 했을까, 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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