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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PD Sep 02. 2015

환상을 구체화하다, 피규어 #1 - 예술품

소개팅에서 점수 깎이는 바로 그 취미에 관한 이야기

”저...저는 취미가 피규어 모으기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보자. 


당신이 소개팅에서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피규어를 모읍니다”라고 답했을 때 이 소개팅이 아름다운 결말을 맺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인터넷에 떠돌던 ‘남성 취미 호감도’라고 하는 출처불명의 도표를 보면 품위와 간지 최하단에 피규어 수집과 애니메이션 감상이 자리하고 있다. 또 결혼 정보 업체 닥스클럽에서 실제로 조사한 결과, 첫 만남 자리에서 호감이 가는 이성의 취미에 ‘피규어 수집, 애니메이션 감상’이 3.7%로 당당히 꼴찌를 차지했다(참고로 1위는33.9%인 스포츠, 아웃도어). 


그렇다. 쿨하게 인정하는 게 낫다. 


이건 이성이 볼 때 폼나는 취미는 아닌 것이다. 

아니라고 믿고 싶어도 묘하게 설득력 있는 표....


그럼에도 좀 항변하고 싶은 여지가 있다.  


해당 조사에서 2위는 24.3%를 획득한 독서, 영화 감상, 미술 감상 등의 예술적 취미가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일 ‘조각품을 모으고 있습니다’라고 했으면 훨씬 높은 점수를 받지 않았을까.


대체 저 조각품과 피규어는 뭐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가격


 조각품 하면 리얼한 인체 조형 혹은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동물 모형 등이 떠오르는데, 무식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난 사실 이런 작품들과 감정적 교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벌거벗은 중세 시대 서양인 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 된단 말인가.

팔목에 찼던 목욕탕키가 어디갔더라.


아마도 이 조각 작품들은 분명 그 당시 시대를 반영했던 트렌디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또 그 시대의 미의 기준이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대의 한 조각을 갖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고 소유하고자 했다.


나는 지금 나오는 피규어들이 바로 시대를 반영하는 현대적 조각품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언맨>이 세계적인 히트를 친 뒤 피규어를 포함한 수많은 관련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영화의 장면을 정말 섬세하게 묘사한 핫토이 같은 피규어도 있는가 하면, 넨도로이드처럼 형태만 따와서 완전히 재해석한 작품들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형태의 제품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실물로서 소유하고 싶은 욕구, 그것이 바로 피규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근본적 욕망이며 이는 예술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언맨과 페퍼 포츠...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카토님)
같은 컨텐츠라도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릴 때 보았던 <근육맨> 관련 제품을 수집하고 있고, 최근에 즐겨보는 <원피스> 피규어 역시 간간히 수집하고 있다. 

개인 수집품 중 <근육맨> 콜렉션. 어릴 때 가장 즐겁게 봤던 만화이다.


사면서 가끔 ‘내가 왜 이걸 사는 거지?’라고 생각해보면 역시 내가 봤던 명장면이나 좋아하는 캐릭터를 가까이 두고 소유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장면을 캡처한 포스터 같은 것도 사봤는데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피규어 특유의 입체감과 조형미는 내가 갖고 있던 평면적인 기억을 현실로 불러오는데, 그게 굉장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특히 화질이나 작화의 디테일이 현시대의 작품보다는 아무래도 떨어지는 고전 만화영화나 영화를 정교한 피규어로 만나는 경우는 마치 클래식 명화가 리메이크(그것도 풀HD 3D로!)되서 나오는 것 같은 즐거움을 준다. 


어릴 적 흐릿한 영상으로 봤던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모공까지 살아 숨쉴 것 같은 디테일의 12인치 피규어로 만났을 때의 생동감은 영화를 감상할 때의 두근두근하던 추억까지도 불러내주는 것이다.

흐릿한 스크린의 추억도 이렇게 생생하게 살려낸다 (카토님)
만화 <베르세르크>의 한 장면을 재현한 피규어 (흑돔님)


피규어 매니아로 유명한 힙합 뮤지션 팻두는 “핫토이는요, 진짜 한번 보면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어요. 영화에서 보고 반했던 캐릭터를 정말 숨이 멎을 듯한 디테일로 재현해놨거든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꼭 리얼리티 넘치는 12인치 피규어를 사야지만 추억을 소장하는 건 아니다. 


몇 가지 특징만 갖춘 SD 캐릭터나 작은 열쇠고리라도 상상력을 현실로 불러내줄 ‘연결고리’만 있으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에반게리온 원작팬들도 배나온 중년 곰돌이 모양을 한 ‘베어브릭’의 레이와 아스카(주: 에반게리온의 히로인 캐릭터)에도 그렇게 열광하는 게 아니겠는가?

사랑이 있다면 체형 따위 문제되지 않는거예요...




자, 그럼 왜 피규어 수집이라는 상상 속의 콘텐츠를 현실로 만들어주는 로맨틱한 취미가 어쩌다 남들 앞에서 얘기하지 못하는, 또는 당당히 얘기하면 점수가 깎이는 취미가 되버린 걸까? 



그건 언론에 등장하는 미소녀 피규어 수집가들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오해하지 마시라. 취향에 대해 얘기하거나 그들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멋진 예술 작품이 누드화면 어떻고 풍경화면 어떤가. 정확히 말하면 이 사태(?)는 ‘미소녀 피규어'를 모으는 사람만 집중 조명해 자극적 방송을 만들어 피규어 애호가 전체를 변태 취급해버리는 언론에 그 책임이 있다.


기억하는가. 예전 <화성인 바이러스>에 출연했던 소위 ‘십덕후’ 이진규 씨. 


이 분은 ‘페이트 테스타로사’라는 2D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사랑에 빠져 평소에도 실물 크기 쿠션을 들고 다니며 캐릭터와 결혼 및  자녀 계획까지 있다고 말하는 상상초월의 입지전적 덕후이시다. 


페이트 관련 상품에만  약 1800만 원 가량 썼다고 본인이 밝히기도 했으며 하나에 약 230만 원 정도 하는 캐릭터 구체 관절 인형을 보유하고 있다. 가히 뿜어내는 덕력이 스카우터를 뚫고 나갈 형국이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오덕페이트


하지만 세상에는 원래 별의별 사람이 다 있기 마련이니 충분히 이런 분이 존재할 수 있고 아마 더 특이한 분도 어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론에서 이런 극단적 예시에 양념을 쳐서 자극적으로 내보내다 보니 ‘피규어 수집가’ = ‘현실 도피 2차원 컴플렉스 미소녀 덕후’로 손쉽게 묶여 버린다는 점이다.


애견가들 중에도 말티즈처럼 귀여운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레이하운드 같은 날렵한 견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듯이 원래 각자 취향이 있고 스타일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동안 ‘키덜트’, ‘덕후’라고 언론에 노출되는 케이스는 모두 자극적 재미를 위한 웃음거리 또는 변태적 집착으로만 포장됐기 때문에 적절한 규모에서 즐겁게 수집하는 사람들도 모두 소개팅 시장에서 매도당하는 외롭고 슬픈 결과가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본다.


사실 ‘피규어’라는 물체에 열광하는 이유를 따지고 보면 장르를 떠나 비슷한 목적성을 띄고 있다.


 이소룡에 대한 마초적 동경이던, <아이언맨>에 대한 콘텐츠적 팬덤이던, 혹은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섹슈얼한 감정이 되었던 피규어는 우리의 환상과 동경을 눈앞에 볼 수 있는 실물로 구체화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환상을 구체화 시키는 피규어…!? (OtakuMouse님)


항상 화면 속에만 있던 캐릭터를 그 모습 그대로 꺼내서 우리 책상 위에 올려주는 마법, 그것이 바로 피규어이다.


내 가슴을 울렸던 그 장면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 그건 사진 애호가나 조각품 애호가나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규어는 단지 그 바탕이 서브컬처일 뿐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살면서 감명 깊게 보았던 만화나 영화가 있다면 관련된 피규어를 미친 척 하고 하나 사보자. 분명히 그 작품이 더 가깝고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며 또 어느덧 피규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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