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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위 Nov 19. 2016

라이트 하이킹

마음이 가벼워지는 길

얼마 전 서점에서 <나무의 온도>(이종우 저, 도서출판 마호)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나무에 온도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니 종이에서도 온도가 느껴진다. 제목만으로 사유를 깊게 하는 책이 있다. 이것은 온도를 측정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다. 벌목해서 말린 나무라도 시간과 정성이 깃들고 쓰임새가 생기면 그것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에는 내세의 온도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산으로 떠나기 전 마음의 무게에 대해서 생각한다.

U·L 하이킹(Ultra Light Hiking)이라는 단어는 일본 여행 칼럼의 번역을 퇴고하면서 자주 발견하곤 했다. 일본의 하이커들은 백패킹에는 작다고 알려진 40~50L 정도 용량의 배낭에 최소한의 짐만을 챙긴다. 그리고 얇은 타프와 트레킹 폴로 설치한 간이 셸터에서 야영을 하는 문화가 매우 일반적이었다. 음료 깡통으로 DIY한 알코올 스토브를 사용하고 테이블과 의자는 숲 속에서 찾아낸 나무와 돌로 대신했다. 간혹 그들이 소개하는 동결건조식품도 의외로 다양한 종류가 있어 놀라웠다. 조리 시 연료 소비가 적은 오트밀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라이트 백패킹을 전파해온 비피엘 기어(www.bplgear.com)의 김민환과 프리 하이커스를 따라 연인산으로 향하던 전날 밤. 클라이밋(KLYMIT)의 35L 배낭에 침낭, 매트, 조리도구를 고심 끝에 하나하나 챙겨 넣으면서 배낭의 무게가 마음의 무게까지 가볍게 하는 순간을 떠올려 본다. 아니면 마음까지 든든한 대용량 배낭이 더 좋은 것인가.

라이트 하이킹을 지향하는 프리 하이커스 멤버들과.

B·P·L(Backpacking Light), U·L(Ultra Light), S·U·L(Super Ultra Light)과 같은 단어가 최근 백패킹 영역에서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100L에 가까운 대용량 배낭은 여전히 그 존재만으로 도보여행의 설렘을 준다. 지금의 경량 백팩도 그 옛날 켈티(KELTY)나 잔스포츠(JANSPORT)에서 만든 지게처럼 생긴 외장형 프레임 배낭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니까. 두 가지 모두 기계적인 동력에 의지하지 않고 걷기를 지향한다는 커다란 맥락에서 같은 가치를 추구한다. 다만 경량 백패킹이라는 다소 새로운 개념의 스타일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무게를 줄임으로써 보다 먼 거리를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여행한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노동의 피로 대신 자연과 유대를 더 친밀하게 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에 식사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숲과 바다에 야영의 흔적을 덜 남기려는 운동도 표방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신체적인 능력에 따라 코스와 일정을 계획하고 도구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다.

차를 끓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앞길을 열어온 선배 하이커 몇 명의 이야기는 지금도 되새겨볼 만하다. 미국의 엠마 게이트 우드(Emma Rowena Gatewood, 1988~1973)라는 여성은 무려 67세의 나이로 미 동부 해안의 전설적인 하이킹 코스인 애팔래치아 트레일 3500km 전 구간을 혼자서 여행했다. 그녀는 생전에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세 번이나 완주했는데 이 코스를 한 번에 도보여행했던 69세의 나이는 여성 최고령 기록이 되었다. 게이트 우드 할머니는 그 뒤에도 미국 전역의 수많은 트레일 코스에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다만 식량과 물을 포함한 짐을 9kg 이하로 제한했고 자신이 직접 만든 자루와 군용 모포 등 무척 소박한 가재도구만을 지참했다고 한다.

미국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3개의 장거리 트레일 코스인 애팔래치아 트레일 3500km,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 4700km,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4200km를 모두 하이킹한 레이 자딘(Ray Zardine). 그리고 경량 백패킹 정보를 세계적으로 공유하기 시작한 백패킹 라이트(www.backpackinglight.com)의 라이언 조던(Ryan Jordan) 역시 울트라 라이트 정신을 계승하려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이 길고 험한 트레일을 경쟁하듯 걷는 문화는 아니다. 선배 하이커들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는 기록이 아니라 균형을 배워야 한다.

맑은 계곡 물.

그렇다고 배낭을 챙길 때마다 저울에 일일이 장비의 무게를 잴 수는 없다. 당일 아침에야 잠 묻은 얼굴로 짐을 챙기는 내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유로운 여행에 물리적 잣대를 내세우는 건 동의할 수 없지만 이것은 그저 일반적인 기준이다. 누구나 도전 가능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룰을 만들 수 있다.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쓰치아 도모요시 저, 진선출판사)에 담긴 내용을 토대로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의 권장 사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물, 식량, 연료, 휴지 등 소비재를 제외한 배낭의 총중량은 4~5kg이다. 2. 가장 중요한 배낭, 셸터, 침낭/매트를 2.5~3kg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 3. 배낭의 내구성을 고려해 배낭 자체와 짐 무게의 비율은 1:10으로 한다. 소비재를 모두 포함한 짐의 무게가 10kg이라고 했을 때 배낭 자체의 무게는 1kg 이하다. 전통적인 경우 짐의 무게가 20~30kg이며 배낭의 무게도 10분의 1인 2~3kg이 된다. 4. 5일 이상의 장거리 하이킹을 할 때 하루 식사의 총무게는 500~600g이 현실적이다. 5. 조리도구는 알코올 스토브, 고체 연료 스토브로 준비한다. 6. 경량 포트의 용량은 평소 400ml, 겨울엔 800ml가 적당하다. 7. 무거운 하이컷 중등산화 대신 로컷 트레킹화를 선호한다.
무게만큼 가벼운 걸음걸이.
단출한 숲살이. Photo by Lee sung hun

모자라더라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야영지(혹은 인생)에서 필요한 만큼을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지혜인가. 그들은 산을 걸으며 술이 떨어지거나 배고픈 밤이 올 것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필요한 것은 힘의 분배와 삶의 각도다. 자연은 낭비가 없다.

자연과 유대하며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서. 조금 더 시간을 뒤로 돌려 미국의 자연주의자이자 문학가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월든>(강승영 역, 도서출판 은행나무)을 참고해 보자. 소로는 조그만 오두막에서 기거하며 2년 동안 자급자족하다시피 살았는데 효모조차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 반죽만으로 빵을 해 먹는 상황을 복기했다. 또한 그는 설탕, 소금도 필요 없다고 일갈하며 커튼에 대해서 재밌는 견해를 보여준다.

“해와 달 이외에 내 집 창문을 들여다볼 사람이 없었고, 달이 비침으로써 상할 우유나 고기도 없었고, 해가 비쳐서 휘어질 가구나 색이 바랠 양탄자도 없었다. 태양이 너무 뜨겁게 내리쬘 때는 가계부에 지출 항목을 하나 늘리느니 보다 자연이 제공하는 커튼인 나무 그늘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더 나은 것이다”

세간의 단조로움이 있는 그대로 자연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준다. 빤하지만 도심에선 무심코 지나치고 마는 인생의 진리. 자연은 소비하기 위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숲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내려놓는 만큼 완성된다. 끝으로 소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자연주의자이자 환경 보전 운동의 선구자였던 존 뮤어(John Muir, 1938~1914)의 한마디를 적는다.      

‘우주로 가는 가장 분명한 길은 야생의 숲을 통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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