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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위 Nov 19. 2016

오키나와 서핑

오래된 카메라

오래전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기를 즐겼다. 필름을 갈아 끼우고 셔터를 누르고 다시 거둬들인 필름이 인화지에 깃들기까지의 과정이 신기했다. 종이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사진관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늘에 대고 현상된 필름을 펼쳐 보는 것이었다. 까마득한 기억처럼 검고 환한 상이 변주되며 나타나면 안심이 됐다. 뭐든 나오긴 나왔구나. 제대로 찍힌 사진은 거의 없었다. 책상 서랍에는 사전 두께만큼 버려진 인화지가 가득했다. 잊고 지내던 필름 카메라의 둔탁한 몸을 다시 만져보게 된 건 최근이다.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와 행장도 풀지 않은 지인을 만났다. 그녀가 맛있게 먹었다는 음식과 영감을 얻은 거리에 대해서 묘사를 늘어놓고 있을 때 가방 사이로 흘러나온 카메라 목줄이 보였다. 거의 3년 만에 들고 나왔지만 막상 사용해보진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빌리기로 했다.

미바루 비치로 들어가는 입구. 미스테리랜치 33L 용량의 ‘스윗피’ 모델.

3년이란 시간 동안 카메라는 한 번도 자신의 속을 들킨 적이 없었다. 셔터를 누르기 전까지 한 줄기 빛도 허용하지 않도록 견고히 만들어진 가슴을 열고 필름을 끼웠다. 빈 마음에 기억이 끼어들면 우주가 될 수도 있다. 두어 차례 프레임에 눈을 가져다 대본 뒤 나는 이 카메라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물안경을 끼고 투명한 바닷물을 들여다보는 기분처럼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고장 난 것이라면 오키나와에 대한 여행 기사가 통째로 날아가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오키나와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면 꼭 이 고집스러운 물건을 통해서이길 바랐다. 어쩌면 우리는 눈으로 본 풍경이 기억으로 착상되기까지 경험과 고민의 과정은 생략한 채 방대하게 생산되는 이미지들에만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아날로그란 불편하고 어려워서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잊고 있던 인간의 감각을 일깨우는 통점과 같으니까. 아날로그 카메라는 아마도 빨간 우체통이나 공중전화처럼 새로운 물건에 떠밀려 잊히는 물건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 정통의 메커니즘을 전수하고 그 세대에 필요했던 기능성과 디자인을 오래 보여주는 것이다. 펜탁스사의 MX가 지인에게 빌려온 카메라였다. 오키나와 현지 편의점에서 구입한 일회용 방수 카메라를 포함해 총 10 통의 필름을 사용했다. 다음은 남쪽 나라 오키나와에서 건진 초보 사진가의 기록이다. 우리가 마주한 풍경은 더 곱고 선명했다.

미바루 비치는 한적해서 연인들끼리 놀러온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텐트를 치고 바다를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연인들이 많이 보였던 조용한 바다.
미바루 해변과 주택지를 나누는 나무들 아래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계신 할머니.
반가워서 뛰어 갔지만 오래 전 문을 닫았다는 상점.
츄라우미 수족관에서 신의 섬이라 불리는 구다카가 보인다. 오키나와를 만든 신이 구다카 섬에 내려왔다는 신화가 있다.  그리고 바다 중간에서 부서지는 포말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오키나와의 날씨는 힘이 세다. 태평양에서 시작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향하는 태풍은 대부분 오키나와를 관통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태풍 파티라는 말도 생겼다. 태풍의 세력이 너무 강하면 휴교령이 떨어져 집에만 갇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냉장고에 보관해둔 식재료를 모조리 꺼내서 요리를 하고 아와모리 술(쌀로 만든 증류주)로 손님을 모으는 것이다. 한겨울인 2월에도 평균 기온이 17도를 웃도는 오키나와는 아열대 기후를 띠고 있어 비도 자주 내린다. 우산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소나기가 자주 내리고 금방 그치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는 사이 산호초로 이루어진 바다의 색깔도 수십 차례 변한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도 다양한 채도를 가지고 있어 오키나와 사람들은 스무 가지 색깔을 띤 바다라고 말한다. 해변에서 멀찍이 떨어진 지점부터 산호지대가 시작되며 수심이 갑작스럽게 낮아진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 멀리 허리 벨트를 찬 듯 하얀 포말이 띠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어떤 서핑 포인트는 약 1km 산호지대를 지나 패들링을 해야만 라인업에 도달하기도 한다. 우리는 중서부에 위치한 요미탄 촌의 남쪽 해변인 토야 비치에서 서핑을 즐기기로 했다. 온쇼어(Onshore)의 영향으로 파도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열 명쯤 되는 10대 무리가 치열하게 파도를 잡아타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유명한 서핑 포인트는 중서부 자탄 초의 스나베(Sunabe) 비치이지만 이날은 파도가 너무 높아 비교적 태풍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온 것이다.

우리를 안내해준 하이 사이(HI-SUY, 하이 사이는 오키나와식 인사말이다) 서핑숍의 코헤이 씨는 일 년 내내 웨트슈트를 입지 않고 서핑을 한다고 했다. 그만큼 수온이 따뜻하다는 것이다. 토야 비치의 바닥은 산호지대는 아니지만 따개비들이 붙어 있어서 리프 슈즈를 반드시 신어야 한다. 슈즈 없이도 서핑을 하는 로컬 서퍼들이 있는데 웬만해선 서프보드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몸부터 떨어져 내려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모습이다. 로컬리즘이 강한 서핑 문화이지만 간혹 라이딩에 방해를 받아도 웃으면서 응대하는 걸 보면 이방인에게 우호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싸움을 싫어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성정은 그들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키나와 중서부 지역인 요미탄 촌의 토야 해변의 파도를 타고 빠져나오는 로컬 소년.
토야 비치는 이곳 주민들이 자주 찾는 서핑 포인트라고 했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스나베 비치다.
하이사이 서핑숍의 코헤이 씨. 원래 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인 데다 수온이 낮지 않아서 일 년 내내 웨트슈트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편입되기 전 류큐왕국이라는 독립된 국가였다. 주변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담당했던 이 조그만 섬나라는 1879년 메이지유신을 겪으면서 일본의 침략에 무너져 내렸다. 오키나와는 가라테 무술의 발상지이기도 한데 일본 군인이 총칼로 무장하고 들어왔을 때 류큐인이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던 수단은 가라테와 재래식 무기뿐이었다고 한다. 전쟁을 싫어하는 그들은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거나 사들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지역이고 이때부터 27년 동안이나 미군의 통치 아래 있다가 반환되었다. 수탈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이곳 사람들은 방어기제로 자신을 보호하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길렀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난쿠루 나이사(어떻게든 될 거야)’라는 말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를 대변한다.

서핑이 아니더라도 오키나와의 바다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오키나와에서도 가장 남쪽 해변인 미바루(Miibaru) 비치는 활동적인 야외 놀이보다는 조용히 여가를 즐기기에 알맞은 장소다. 관광객들로 붐비지 않고 인공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코카콜라 로고가 새겨진 가게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뛰어갔지만 오래전 문을 닫았다고. 생활의 흔적이 나루터나 할머니들이 모이는 벤치에 녹아들어 있을 뿐이다. 옥색의 바다와 산호 퇴적물이 해변을 이룬 미바 루비치는 바다가 코앞인 숙박시설에서 조그만 배로 투어를 진행하거나 바닥이 훤히 보이는 유리 보트를 대여해준다. 낚시와 스노클을 즐기는 연인들도 찾아볼 수 있다.

오키나와의 임금 수준은 일본 내에서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지역답게 남자들은 대체로 느긋하고 여자들의 생활력이 강하다고 알려졌다. 남자들이 매력을 표출하는 때는 월급날이 아니라 에이사라는 전통 공연이 열리는 매년 9월 오봉(추석)이다. 오키나와의 대표적 현악기인 산신을 중심으로 북춤을 추는 에이사는 서민들이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놀이였다. 커다란 북을 자유자재로 놀리며 뛰어다니는 남자와 그들을 사랑하는 여인들. 남부 난조 시에 자리한 오키나와 월드에서 류큐 문화를 알리는 공예품을 전시하고 에이사 공연도 진행한다. 깨끗한 자연환경과 낙천적이고 소박한 마음 때문인지 오키나와는 장수국가로 알려진 일본에서도 100세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뭐든지 함께하길 좋아해서 잔치, 결혼식, 연회의 마지막에 다 같이 일어나 춤을 추고 전통 민요를 부르는 ‘가차하시’ 전통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다. 오키나와의 술집에서 갑자기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도 오키나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


필름 카메라를 바다 깊은 곳까지 들고 들어와 찍은 한 컷. 
네이처 미라이에서 진행하는 맹그로브 카누. 킨 초를 흐르는 강이 중동부 바다로 합류하는 지점인데 맹그로브 나무 4가지 종류 중 3가지가 이곳에 서식하고 있다.
국제거리에 위치한 전통 주점인 투바라마. 저녁 7시부터 매 시간마다 30분씩 산신 공연을 한다.
중서부 해안에 솟은 온나(Onna)산에서 바라본 풍경.
오키나와에서 먹는 오겹살 장조림 라후테이, 3분 커리, 낫또, 오리온 맥주로 저녁을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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