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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위 Nov 11. 2016

겨울 사냥

폭설

석고상처럼 눈 덮인 대둔산을 에돌아 사냥꾼의 집으로 가는 길. 눈이 쌓이는 부분과 음각의 사각지대와 도드라진 암벽이 바람의 결에 따라 시시각각 명암을 바꾼다. 산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죽음과 삶의 접점을 저 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렵다. 눈이 붉은 사냥꾼의 집에는 숨이 빠져나간 사슴 머리와 마른 곰 가죽이 벽 한편을 채우고 있을까. 뒷마당의 건조대엔 빨래 대신 식은 사냥감들이 무두질을 기다리고 있을까. 통영 대전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대둔산으로 오르는 도로를 한 거푸 지나면 평촌마을이 나온다. 30여 년만이라는 폭설을 차로 느껍게 밀어내며 선배 기자의 아버지이자, 자식들에게도 사냥을 가르쳤다는 류홍식 엽사의 집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 작은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지나서 우회전을 하면 멀리 주황색 풍차가 보일 거야.” 전화기 너머에서 선배는 마치 자신이 운전을 하고 있는 양 달떠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 고향 풍경이 선할 것이다. 얼어붙은 개천과 돌담 사이로 나 있는 길 끝. 지붕을 덮고 남은 쇠 조각을 오려서 만들었다는 풍차가 겨울눈을 동력으로 삼아 세차게 돌아가고 있다. 낡은 처마 아래엔 다행히도 너구리 가죽 대신 소담스러운 감 몇 알이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사냥은 포획의 행위라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이었어. 지금도 가끔 아버지, 남동생과 팀을 이뤄 짐승의 흔적을 발견하는 과정은 추억을 더듬는 우리만의 방식이지. 자연은 놀이터이자 배움터였고, 내 유년의 대부분은 그 안에 있더라고.” 얼마 전 선배는 남동생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냥 용품점을 차렸다는 푸념으로 시작해 자신이 경험했던 사냥의 기억을 복기했다. 신년호를 앞두고 특집 기사거리를 찾던 중 솔깃한 이야기였다. 다음 날부터 선배를 졸라 그녀의 아버지에게 엽사 몇 명을 소개받기로 한 것이다. 나를 비롯해 4명의 촬영팀은 이틀 동안 그들을 따라다니며 사냥의 순간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어렵게 찾은 선배 고향집 뒷편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했다. 이튿날 아침에 감나무 끝에 달린 언 홍시를 따 먹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맛이 잊히지 않는다.

사냥개(Pointing Dog)의 목에 채워놓은 훈련기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던 비프음의 속도가 빨라졌다. 개들이 걸음을 멈춘 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훈련된 엽견은 쉴 틈 없이 탐색하다가도 고립된 목표물을 발견하면 즉시 정지해 주인을 기다린다. 긴장된 순간이 지나고 비장하게 응시만 하던 개들이 신호와 함께 달려들자 장끼 한 마리가 날아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간 총소리는 완강했고 새는 미리 겨누고 있던 산탄에 날갯죽지를 맞고도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얼어붙은 수락계곡과 금남정맥의 산봉우리가 그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쏟아져내렸다. 겨울 하늘에 눈송이와 깃털이 함께 날렸다. 얼마 가지 못해 떨어진 지점은 엉클어진 찔레 덤불 속이었다. 막막한 수풀 속에서 찬 숨을 고르며 겨우 몇 발짝 내디뎠을 때 엽견 무리 중 경력이 가장 오래된 아메리칸 브리타니(American Brittany) 견종 산이가 서릿발을 파헤치고 뛰어들어 왔다. 곧이어 장끼의 눈이 캄캄해지고 동료 개들이 내심 부러운지 입을 굳게 다문 산이 주위로 다가와 컹컹 짖어댔다. 내년이면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김신배 엽사가 총을 거두고 5년째 파트너로 지내는 견공과 죽은 꿩의 상태를 함께 살폈다. 12월 초순에 내리는 폭설을 맞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마음은 일희일비했다. 힘없이 몸을 늘어뜨린 꿩이 안타까운 한편 생기 넘치는 개들과 초로의 포수를 원망할 이유는 얄팍했다.


덤불 속에서 총에 맞은 꿩을 물고 나오는 산이.

오랜 세월 동안 사냥은 인간이 고기를 얻는 중요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몽골의 늑대 사냥꾼 이야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몽골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목민들은 양과 말 등 가축을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여긴다. 현대화의 바람에 밀려 좁아지는 유목민의 터전처럼 야생 늑대도 줄어든 먹이를 찾아 인간의 몫을 탐내는 대립각 사이에 늑대 사냥꾼이 있다. 양쪽 모두 생존의 기로에서 최후의 선택을 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수렵도 야생동·식물보호법에 따라 서식하는 짐승의 개체 수를 조절해 생태계의 긴장을 도모하고 민가와 농사에 끼치는 피해를 줄이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 올해(2014년 기준) 역시 11월 중순 총 35개 행정구역별 시와 군에서 수렵 면허를 소지한 엽사를 대상으로 엽장(사냥터)을 개방했다. 2월 말까지 약 4개월 동안 허용되는 기간 중 제한된 숫자 내에서 포유류는 멧돼지․고라니․청설모 3종, 조류는 꿩․멧비둘기․참새 등 13종의 포획이 가능하다. 또 엽사는 수렵에 관한 법령, 야생동물 보호 사항, 총기 사용방법 등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면허 취득이 가능하다. 이와 동시에 총기와 탄약을 구입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진다. 실수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다칠 수 있으므로 수렵보험도 든다고 한다. “수컷 고라니는 송곳니와 같은 견치가 있어서 위험해요. 멧돼지의 경우 빗맞았을 때가 가장 무서워요. 화가 난 상태에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거든요.” 김신배 엽사의 오랜 동료이자 후배인 이희원 엽사도 잠시 눈이 내려앉은 총을 닦고 길을 재촉했다. 프렌치 브리타니(French Brittany) 견종 솔과 잉글리시 세터(English Setter) 견종 세타도 기분이 좋은지 두껍게 쌓인 눈밭을 펄펄 뛰어다녔다. 저 용맹스러운 엽견들은 주인의 습관과 말투를 기억하기 때문에 반드시 직접 교육한다고.


강원도 몇몇 산간 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발령됐다는 내용이 라디오 전파를 탔다. 하늘도 하얗게 덮을 만큼 눈이 내렸고 그중에서도 대둔산이 가장 많은 눈을 맞고 있었다. 첫날 야영지로 물색해 놓았던 완주군 산북리 뒤꼍으로 차를 몰았다. 동행하던 4륜 구동 차량이 얼어붙은 눈길 위에서 미끄러져 수직으로 도랑에 박힌 뒤 구조차를 부른 뒤였다. 수습을 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 급하게 팩 다운을 하고 화덕과 난로에 불을 피웠다. 캠프파이어는 추위 속에서 사람을 모으고 야영지에 에너지가 깃들게 한다. 영국의 방송인이자 캠퍼인 매슈 드 어베이투어(Matthew De Abaitua)는 <더 아트 오브 캠핑(THE ART OF CAMPING)>이라는 책에서 ‘캠프파이어가 우리 캠프의 엔진,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서술했다. 우리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숨과 피부와 눈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모닥불을 쬐던 이희원 엽사가 꿩의 가죽을 벗겨 눈밭에 던져놓더니 꿩탕을 끓이겠다고 한다. 닭볶음탕과 비슷하지만 감자 대신 무를 넣고 육질은 조금 질기다. 한 모금을 떠넘기자 발가락 끝까지 온기가 전해져 오는 기분. 부족한 재료로 끓이는 음식이지만 굳은 몸을 풀어주기에는 그만이다.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차를 끓이며 소란스러운 하루를 지새웠다. 선배 사진가는 불안한 나머지 펄럭이는 텐트 한편을 붙잡은 채로 잠들었다고 한다.


간밤에 우리가 먹다 남긴 음식을 눈독 들였을까. 자고 일어나니 캠프 사이트 주변은 오랫동안 망설인 금수의 발자국들로 어지러웠다. 야영을 하는 사흘 동안 두메산골의 겨울은 여전히 춥고 어려웠다. 잃어버리고 부러진 장비가 여러 개였다. 숲의 신은 우리를 편하게 두지 않았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야. 한 마리의 죽음이 다른 다섯 마리를 살게 하지. 그리고 나도 동물일 뿐이야.”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촬영된 니콜라스 바니에르(Nicolas Vanier) 감독의 <마지막 사냥꾼(Le Dernier Trappeur)>은 가죽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냥꾼을 소재로 했다. 사냥꾼에게 가장 필요한 통찰은 자연과의 조화. 한 마리의 죽음과 다섯 마리의 삶을 통해 자연의 균형을 깨우친다.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의 균열은 저 선연한 핏방울이 아니라 숲과 강을 포장하고 있는 아스팔트 도로나 거대한 댐 같은 것인지 모른다. 마지막 날 아침 어느새 백면서생의 얼굴처럼 고요해진 길을 헤치고 나왔다. 무거운 겨울,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잠긴 이 산속에서 자연은 더욱 건실하게 생명을 키워낼 것이다.

중앙아시아 키르기스 지방의 유목민이 사용하는 유르트에서 영감을 얻은 힐레베르그 알타이 텐트. 그리고 엑스패드 아크텐트.
젊은 엽사들. Photo by OZ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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