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이거 만들래? 하는 제안에 어쩌다 8년이 흘러버렸다.
최대한 간추려서 써보려고 한다. 나는 2016년부터 2025년까지, 8년동안 스타트업을 다녔다. 꿈과 희망의 시절부터, 회의감과 저성장의 시대까지. 빛났고 어두웠고 고마웠고 무감각했던 마음들과 기억들.
0. 스타트업 호황기 인 줄도 모르고, 누렸다.
2016년~2018년, 어쩌다 초기멤버로 일하기도 하고, 공동 창업을 하기도 했다. 그 때는 가진 게 없어서 망설일 것도 없었다. 우리가 꾸는 꿈이 정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투자를 잘 받는 건 우리가 뛰어나서인 줄 알았다. 매일 노트북 앞에서 슬랙만 하던 나는 거시경제도 잘 몰랐다. 돌이켜보면 경제가 좋았던 시기였고, 펀드 금액이 투자처가 마땅치 않았기에 IT 업계로 VC가 쏠렸다. 나는 운이 좋은 줄도 모르게 운이 좋았다. 그래서 시작했던 스타트업이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는 호사를, 기적을 경험했다.
1. 코로나 시절, 몸값을 한껏 높이고 최고의 비전을 꿈꿨다.
2019-2021년, 내가 속한 회사도 잘되고 있었고 나도 직업과 직장에 애정이 많았다. 코로나 시절에 자영업이 망하는 중에도 나는 풀 재택으로 배달음식 먹고 편하게 근무하면서 열심히만 일하면 다 잘 될 줄 알았다. 또 한번 이직을 하고, 나의 이전 경험이 좋게 평가되면서 연봉도 꽤 올랐다. 새로 합류한 회사에서 말한 비전에 가슴이 뛰었다. 내 일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었다. 효능감과 자신감이 치솟아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일했다. 함께한 사람들도 너무 좋았기에, 감히 회사가 잘 안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 불황이 가져다 준 '안정적인 매출'에 대한 양가감정.
2021년 - 2023년, 코로나가 종식되면서 IT 버블이 사라지고 next big thing 같았던 가상화폐와 메타버스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IT 업계에 무자비하게 풀리던 돈은 조금씩 말라갔다. 내가 다니는 회사도 '안정적인 매출(MRR, ARR)'에 대한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순매출' 이라는 도전과제를 위해 나도, 동료들도 이전과는 결이 다른 일들을 해야 했다. 업무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꿈과 비전을 팔기 보다는 당장 매출을 내야했다. 그래서 나도 내가 하던 일을 넘어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해야 했다. 직접 미팅도 다니고, 불만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회사는 매출을 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인정하면서도 괜히 억울해서 울기도 했다.
3. 궁금했던 글로벌 경험까지.
2023 - 2025년, 나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지 않는 사람인데 언젠가 구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한 적이 있다. 기저에는 변화의 최전선에 있고 싶기도 했지만, 내가 만든 서비스가 글로벌하게 영향력을 미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그렇게 글로벌 서비스를 운영하고 싶었는데, 결국 글로벌 서비스도 담당하게 되었다. 통역사를 끼고 미팅하기도 하고 영어 회의를 주도하기도 하고, 문서를 다국어로 써서 전파하기도 했다. 화려한 모습을 꿈꿨지만 실상은 그다지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않았고 복잡도가 올라가고 성장은 더디다고 느껴졌다. 뭐지? 언젠가부터 다 갖고도 답답하고 꿈을 이룬 것 같은데도 공허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4. 여전히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돌이켜보면 나는 성격이 급해서 빨리 실행해야 하고, 위험 혹은 불확실을 무서워하지 않는 편이라 성향상 스타트업에 올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기술 좋아하고 이것저것 만져서 뭔가 만들어지는 것 그 자체도 워낙 좋아했다. 게다가 보수적이고 딱딱한 걸 병적으로 싫어했으니, '제품'뿐만 아니라 스타트업의 '조직 문화/분위기'도 좋아했을 수 밖에.
한국 스타트업의 역사도 오래되면서 내가 사랑했던 스타트업의 분위기도 요즘은 많이 바뀐 것 같다. 전처럼 도전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나도 바뀌기도 했다. 우선 나의 나이도, 경력도 달라졌고 그 사이 내 성향도 바뀌었다. 나는 이제 주니어가 아니고, 나는 20대가 아니고, 나는 이전처럼 불같지도 않고 이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가 아니다.
스타트업이어도 월급 루팡은 존재하고, 스타트업이어도 유리천장은 있으며, 특히나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프레임과 승진차이는 존재하며, 스타트업도 학벌을 따지거나 가방끈을 따지기는 매한가지이며, 스타트업이 꼭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니며, 스타트업 복지가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도, 투자도 우리가 대단히 무언갈 잘해서 받은 게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회의감이 들었다고 해서, 그 당시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열정과 의지로 밤을 지새워 만들고 토론하고 실험하고 테스트 했던 기억이 빛을 잃는 것은 아니다. 해냈을 때의 뿌듯함과 함께 해냈다는 전율은 아직도 참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진심으로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사실 그러기를 바랬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건 살다보니 낯뜨거운 진실이 너무 많고 노력으로도 안되는 게 너무 많으며, 내가 믿은 건 동화였을 수도 있고, 우리도 어떤 경제 흐름 속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나의 열정도 그 때가 만들어 준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복잡한 마음 때문이다. 여전히 '스타트업에서 계속 일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스타트업'이 무엇인지 재정의해야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5. 계속 일해보겠습니다.
'스타트업'에서 계속 일하고 싶은 지는 모르겠다. 다만 완전히 다른 직군 2년과 IT 스타트업 8년, 치열하고 다사다난했던 10년을 거쳐오면서 내게 남은 기억, 마음, 태도, 인연들, 교훈들이 참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느낀다. 꿈과 희망에 부풀었던 내가, 우리가, 이 업계가 어느 정도 사회화되고 현실감각을 느끼면서 중도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나의 성향도 크게 바뀌지 않을 것 이다. 어쩌다 여기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처럼 앞으로의 10년도 어쩌다 어딘가로 흘러가겠지. 나는 또 어떤 여정을 만들어 나가게 될까. 어떤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어야 할까. 조금 더 차분하고 단단하고 오래된 마음으로 다음 여정을 준비하고 싶다.
'스타트업에서 계속 일하고 싶냐' 는 질문을 곱씹다가 단어 하나만 지워본다.
"계속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