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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Jan 28. 2024

안개 속의 사내

[단편소설]

병원 응급실. 온몸이 피와 흙범벅으로 엉망인 추레한 사내가 누운 침대가 쏜살같이 들어섰다. 마치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 양 각종 기기가 그에게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심장박동을 보여주는 모니터의 뾰족뾰족한 선들은 그의 삶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산은 점점 더디고 작아지더니 삐---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로 긴 직선을 그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가득 찬 길, 멀리서 움직이는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다가오는 것인지, 멀어지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그 형체는 어슴푸레한 안개 사이로 조금씩 실체가 드러났다. 그 사내였다.


다 늘어난 누런 런닝에 더러운 츄리닝 바지를 입고 꼬질꼬질한 맨발에 헐렁한 슬리퍼를 신은 남루한 차림이었다. 그는 초점 없이 생기를 잃은 눈동자로 천근의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안개 속을 걸어오고 있었다. 이내 중심을 잃고 휘청대더니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그 자리에 고장난 듯 한참 서있었다. 사내에게선 아무런 삶의 의욕도 느껴지지 않는다. 비틀비틀 걷는 걸음에 맞춰 오른손에 든 흰 비닐봉지도 맥아리 없이 흔들거렸다.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두 아이의 아버지로 살았다. 그도 한 때 꿈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랑도 했다. 희망도 있었다. 퇴근한 그와 종일 아이에게 시달린 아내가 정성스레 차려준 밥을 아이들과 둘러앉아 먹었던 저녁 식사의 소중함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일상적인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빌어먹을 서류에 사인만 하지 않았더라면.


집에 빨간 차압 딱지가 붙으며 아수라장이 된 날, 그 꼴을 보고도 사내는 절대 그 녀석이 그럴 놈이 아니라고 했다. 그와 중학교 때부터 형제처럼 지내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주로 못된 짓을 하면서 쌓은 우정이었지만. 분명 대박칠 것이라고 이번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다. 자길 못 믿느냐면서.



기억... 기억은 희미해져 있다. 하도 술을 퍼마셔 대서 알코올에 휘발되어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해졌다. 그는 오늘이 며칠인지, 자신이 몇 살인지, 자식들이 몇 살인지도 잊었다. 언제부터 집구석에서 술만 퍼대고 있었는지 가물가물했다.


그 잘난 우정을 담보로 한 사인으로 인해 평생을 갈아 넣어도 불가능한 금액의 빚이 생겼다. 가족이라도 지키기 위해 아내와 위장이혼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머지않아 진짜 ‘이혼’이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집. 그는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빚 갚을 돈은 없었지만, 술 사 먹을 돈은 있었다.


돈이 떨어지면 취기도 떨어진다. 그럼 점점 정신이 돌아온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하나둘씩 선명해지려 한다. 운 좋게 큰아이 방에서 돼지 저금통을 찾았다. 흔들어보니 달그락 소리가 난다. 그는 무딘 커터 칼로 허겁지겁 저금통의 배를 가르다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저금통 안으로 뚝뚝 흘러 들어갔다. 그는 개의치 않고 있던 동전을 탈탈 털어냈다. 소주 한 병값도 되지 않았다. 사내는 희번덕 살기 어린 눈으로 다음 타겟을 찾아 나섰다. 하얀 철사로 된 옷걸이를 펼쳐 안방 장롱 밑을 훑고, 거실 소파도 들어 보았다. 먼지 뭉텅이만 잔뜩 나왔다. 또르르 무언가가 굴러 나온다. 아이가 찾던 장난감 공이 여기 있었다. 하지만 없다. 그가 찾는 건 오직 돈이다. 겨울 잠바 안주머니에서 드디어 오천원짜리 한 장을 찾았다. 


성취감을 만끽하며 거실로 나온 그는 혼란스럽다. 바닥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검붉은 핏자국과 어지럽게 찍혀있는 핏빛 손자국들. 술만 들이키던 지난 몇 개월 중 가장 필사적인 날이었다. 소주 한 병을 위해 상처가 난지도 모른 체 장롱 밑을 뒤지고, 소파도, 장식장도 들어냈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사내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앉아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허겁지겁 현관문을 나섰다. 

‘뭐라도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는 갑자기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솟았다. 그 어마어마한 빚도 갚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힘이 솟아났다. 피범벅인 손에 지폐 한 장을 꼭 쥐고 취기가 덜 가신 몸을 이끌고 갈지자를 그리며 집은 나섰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매번 술을 사러 드나들던 편의점 앞이다. 편의점 옆엔 약국이 있다. 그는 편의점과 약국의 경계에서 잠시 주춤했다. 술을 사서 어제와 같은 날을 하루 더 연장할 것인지, 아니면 용기를 낼 것인지. 그는 나름 단호한 발걸음으로 약국 문을 열어젖혔다. 약사에게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다친 손을 내밀었다. 50대 아줌마로 보이는 약사는 놀란 눈으로 경계하며 소독약과 연고, 붕대를 내주었다. 피로 범벅된 돈을 내밀자, 약사는 마지못해 받아 든다. 그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약국을 나섰다. 그가 혼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살기 위한 소비를 했다. 하얀 불투명 비닐에 담긴 약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며 다짐했다. 다시 이 생을 살아보리라.


최대한 똑바로 걸어가려 했다. 아이가 걸음마를 했던 그 순간처럼 한걸음, 한걸음. 그럴수록 신기하게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용기를 뿜어내며 앞 횡단보도를 정성껏 건넜다.


쾅! 사내의 삶을 흔드는 커다란 굉음. 신호를 무시한 화물차가 그를 쳤다. 그의 몸은 갑자기 붕 날아올랐다. 그의 새 삶의 시작인 약봉지는 그의 손을 떠났다.




사내의 눈에는 밝은 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만 들릴 뿐. 

띠. 띠. 띠.  띠.   띠.    띠.     띠-----------------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듯 아득히 그는 생과 멀어졌다.


비틀비틀 푸른 새벽안개 속을 걸어간다. 걷고 또 걷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을, 코앞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그 길을 한 발 한 발 외롭게 걸어간다. 무겁고 뿌연 안개는 이내 사내를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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