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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진영 Aug 16. 2022

백석을 읽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를 읽으며 자랐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백석은 곧 나타샤였고, 흰 눈이었고, 푹푹 눈 나리는 겨울이었다.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종종 알은 체를 했고, 그의 시어를 빌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대부분 그의 시를 세 편 이상 읽은 적이 없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아호인 백석을 필명으로 삼았다.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잡지 <여성>의 편집자였으며 한때는 영어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의 시집은 1936년에 펴낸 <사슴> 한 권밖에 없지만 그는 꾸준히 시를 썼다. 서럽고 무참하던 시절에 그가 쓴 시는 따뜻하고 안온한 세계를 그렸다. 행마다 사투리가 진했고 시선은 깊었다. 그러나 따뜻한 아랫목 같은 그의 시 안쪽에는 언제나 차가운 윗목이 함께한다. 그의 말처럼 시인은 높고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서 온기와 사랑을 글로 적으며 그것을 바란 것은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 영어사범학을 전공한 뒤 고향과 서울과 만주를 오가며 살아간 그의 행보는 분단 이후부터 분명치 않다. 1960년대 북한의 정책으로 작품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는 것, 1996년 즈음 85세 나이로 사망했다는 정도다. 백석 시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일 것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고, 오늘밤 푹푹 내리는 눈을 두고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는 내용은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나타샤와 함께 흰 당나귀를 타고 어느 산골로 가서 살고 싶은 간절함이 진했다. 재북 작가인 그의 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80년대가 지나서다. 평안도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해 읽기 힘든 그의 초기 작품들을 두고 혹자는 촌스러운 문학이라고 힐난했다지만, 백석은 한국의 현대 시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조금 늦었으나 백석의 작품들과 문학 세계를 연구한 이들 덕분에 몇 권의 책을 만날 수 있게 됐다. 


가장 먼저 꼽는 책은 문학동네에서 2007년에 첫선을 보이고 올해 1월에 개정 발간한 <정본 백석 시집>이다. 지난해 가을에 펴낸 <정본 백석 소설 수필>과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인데 백석을 논하는 가장 좋은 책으로 꼽힌다. 백석의 작품을 오랜 시간 연구하고 몇 편의 책을 내놓은 고형진 교수가 엮었다. <정본 백석 시집>은 ‘사슴’, ‘함주시초’, ‘흰 바람벽이 있어’ 등 총 3부로 나누어 시를 소개하며 뒤쪽에는 시 원본을 함께 수록해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고형진 교수는 방언이 많아 읽기가 까다로운 백석의 시를 당시의 언어, 풍속, 지리, 역사 등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정확하게 풀이했다. 백석의 시 세계에 대한 설명과 그의 언어와 표기법, 작품 연보도 꼼꼼하게 소개한다. 


2019년 1월에 발간된 <여우난골족 : 백석 시전집>은 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을 비롯해 분단 이후 발표한 시를 함께 소개한다. 아이들을 위해 쓴 10편의 동시도 함께다. 특히 남의 모습이 좋아 보여 흉내를 내다 혼쭐나는 새우 사 형제의 이야기는 웃음과 교훈을 전한다. 이 책은 북방 사투리와 고어, 백석만의 독특한 시어를 500개에 달하는 주석으로 풀이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으며 입으로 맛보는 듯한 생생한 백석의 시와 정서를 공유하기 위해 탄생한 책이다. 


백석의 문학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한 책이 있으니 2009년 소래섭이 지은 <백석의 맛>이다. 그는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110여 가지 음식을 통해 그의 시와 시 세계는 물론 당대 서민의 삶과 사회상을 살핀다. 100부 한정판으로 발매된 백석의 시집 <사슴> 한 권이 2원이었다는 것, 그것이 냉면 20그릇에 해당하는 가격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게 됐다. 음식에 대한 시인의 집착을 보여준 ‘국수’, 지속성을 의미하는 푸른 배가 등장하는 ‘정주성’, 지역색을 음식의 나열로 드러낸 ‘통영’, 세속의 식욕과 부처의 계율의 모순을 모밀국수에 담아낸 ‘북신’까지 시와 음식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백석 시를 음식 지도로 표현하는 기발함도 돋보인다. 

<백석 시선>은 그의 시를 한글과 영어로 볼 수 있는 책으로 2017년 출간됐다. 한국 시의 정수를 국내외 시장에 선보이는 아시아 출판사의 ‘K-포엣’ 시리즈 중 하나다. 백석의 시 20편을 선정하고 미국 중서부 독립출판협회 피터 립택 부회장이 영역했다. 우리말 특히 방언을 어떻게 영어로 표현했을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볼 것.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예로 들면 ‘Poor in my poverty / As I loved the beautiful Natasha / Tonight the snow descended completely’로 영역했다. 토속적인 백석의 시어를 읽는 새로운 방법, 이방인의 눈으로 본 그의 시가 어떠한지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쓸쓸하고 고독하며 충만하고 고귀한 독자들을 위해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읽는다. 그의 시로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며.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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