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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진영 Apr 25. 2023

떠올리는 밤

떠나버린 한 사람과 남겨진 것들에 관하여

그의 문장을 읽는다. 활력 넘치지 않으나 은근하게 살아내는 한 사람의 기록이다. 밤의 말들을 옮겨 쓰고, 남겨진 기억을 더듬고, 어머니의 눈물 겨운 맛을 떠올리는 행간들이 마치 골짜기 같아서, 나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머무르기를 반복했다.


삭제되지 않은 그의 SNS를 살피며 그가 사라진 몇 해 전 겨울날을 떠올렸다. 나는 그가 죽음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년 전 출근 준비를 하다 쓰려졌다는 것도, 그후 꼬박 앓았을 시간과 생각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의 부고를 전해 듣고도 문상을 가지 않았다. 마음을 독하게 앓던 당시의 나는 죽음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내게 상처를 준 불편한 얼굴들을 마주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나는 딱 그만큼 이기적이기로 했다. 먼훗날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그가 결혼 후 아내와 떠났다는 스페인 여행의 흔적을 따라다녔다. 영정 사진으로 사용했다는 선글라스를 쓴 모습을 꼭 찾고 싶어서다. 그는 좋은 사람들, 안락한 집, 이국적인 거리와 맛있는 음식을 자주 포착했고 소회를 적었다. 그는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처럼 살아 있었다. 내게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완이다. 버릇처럼 일 년에 몇 번인가 그가 떠오르면 환영 같은 장면들을 만들었다.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고 있지 않을까, 겨울처럼 시린 음악을 들으며 술 한 잔을 마실 거야, 아내가 만들어준 야식을 앞에 두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면접을 이유로 한 카페에서 그를 처음 마주한 날에 그는 내게 별 질문을 건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을 하는 동안에도, 팀원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도, 내가 일터를 떠나기로 결정한 날에도 그는 말을 아꼈다. 아니 삼켰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나눈 대화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닐 텐데 마음에 남은 것은 많지 않다. 오히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 마주 앉은 자세, 멀어져 가는 걸음걸이, 어떤 순간의 표정, 눈빛과 손동작 같은 것들이 더 선연하다. 그는 내게 이미지로 남은 사람이다.


봄밤에 문득 그가 떠올랐다. 유산처럼 남겨진 그의 문장들을 읽으며 미소 짓거나 찡그렸다. 어느 겨울, 그가 사라졌다. 겨울을 지나 봄으로 갔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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