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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진영 Aug 24. 2023

기억

새벽 3시 32분에 떠오른...

엄마에겐 싱크대가 없었다. 부엌 한쪽에 세워진 수도꼭지가 전부였다. 엄마는 큰 대야 하나와 그보다 조금 작은 대야를 나란히 두고 앉아 생선을 다듬거나 야채를 씻거나 설거지를 했다. 키 낮은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어쩐 일인지 웅크리고 앉은 엄마의 뒷모습만 떠오른다. 아홉 살의 나는 그곳에서 처음 냄비 밥을 하고 엄마를 흉내 내며 동네 언니들과 산에서 캐온 쑥을 다듬었다. 어느 날엔 사촌 언니와 양파 껍질을 벗기고 썰어 달짝지근한 볶음을 해 먹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양파가 맛있다고 느낀 날이다. 


겨울이 오면 부엌은 목욕탕이 되기도 했다. 커다란 타원형 고무 대야를 꺼내고, 연탄아궁이를 덮는 뚜껑과 관으로 연결된 물통 안에서 뜨거운 물 몇 바가지를 퍼낸 후, 적당한 온도가 되기까지 찬물을 섞었다. 물은 따스해도 공기는 차서 나는 오드드 몸을 떨며 서둘러 씻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내 생각보다 빠르게 얼었지만 아랫목의 온기가 있어 괜찮았다.


하늘색과 흰색, 연두색으로 된 작은 타일을 이어 붙인 부뚜막과 때 맞춰 갈고 공기구멍도 세심하게 조절해야 하는 연탄아궁이, 아껴 써야 했던 온수와 타다다닥 소리를 내며 켜지는 낡은 가스레인지. 신문물이라며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온 탈수기. 그런 것들이 또렷한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잘 알지 못한다. 밥상을 들이던 작은 쪽문을 열고 부뚜막으로 뛰어넘다 지하실로 들어가는 계단으로 떨어진 기억, 나무 쪽문 위에 컬렉션처럼 빼곡하게 붙어 있던 아버지의 성냥갑, 겨울이면 삐걱이는 소리를 자주 낸 작은 마루와 이불홑창을 바꾼 날이 제일 좋았던 두툼한 솜이불, 그 사이에 곱게 넣어둔 아버지의 밥공기. 그런 것들이 왜 점점 분명해지는지도 잘 모른다. 


이불 하나씩을 깔고 아랫목부터 차례로 누웠던 나의 형제들, 밤중에 꺼이꺼이 울면서 보았던 한국 영화,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간격을 두고 지은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줌마의 높은 언성과 끝내 아무 대꾸도 하지 않던 아저씨의 침묵. 나는 그곳에서 불편했고, 따뜻했고, 서러웠고, 행복했다. 겹겹의 감정들이 모여든 날들이 나를 키웠을 테다. 언덕 위 작은 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내 마음의 은신처.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와 까칠한 수염을 볼에 문질러대는 어느 밤이, 나는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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