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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곤 Nov 07. 2017

스트라이크 존


   테니스공으로 하는 야구는 우리 동네 친구들의 매일 일과였다. 아파트 단지 가운데 자리 잡은 배드민턴장이 구장이요, 빨간 칠 된 콘크리트 바닥에 매일 굴러 시커메진 테니스공이 공인구였다. 심판은 당연히 없고(누구든 한쪽 팀에 끼고 싶어 하니까) 선수도 매번 모자라서 주자 만루가 되면 1루에 투명인간을 세워야 했지만,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펼쳐지는 야구 경기의 열기는 매일이 한국시리즈였다. 관중은 그 만 분의 일도 안 되었지만.


   한 달에 한 번쯤 구경 가던 수원 야구장의 현대 유니콘스가 없어졌을 쯤이었나? 우린 제법 겁이 없어진 초등 고학년이었고, 우리의 구장은 학교 운동장, 공인구는 안전야구공(연식야구공이라고도 하는데, 안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그런 공)으로 발전해있었다. 테니스공 시절에는 투수와 타자가 적당히 합의하고 이견이 있으면 야수가 중재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정했었지만, 학교 운동장에서는 새로운 기준이 적용됐다. 공이 구령대 바로 앞 홈베이스를 지나 구령대 아래의 체육창고 철문을 맞추면 스트라이크. 지금 되돌아보면 터무니없이 드넓은 스트라이크 존이지만, 포수도 없는 동네 애들 야구에 너무 많은 걸 바라진 말자.


   스트라이크 존이 쇳덩이 철문이다 보니 볼-스트라이크 판정에는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야구공이 철문을 때리는 둔탁한 "퍽" 소리가 곧 스트라이크 콜. "퍽" 소리 세 번이면 타자는 아쉽지만 다음 타자에게 하나뿐인 나무 방망이를 넘기고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시간이 꽤 흐른 다음의 어느 날, 영화를 보다가 등장인물이 쇠로 된 문을 격렬히 두드리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소리가 동네 야구의 스트라이크 "퍽" 소리와 닮아 있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야구하며 놀던 추억이 떠올라 영화 줄거리를 놓쳤다... 고 하면 과장이고 거짓말이지만, 철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는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겐 스트라이크로 기억돼 있다.


   야구를 좋아하던 소년기에 비해 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트라이크 존은 사실 대강의 원칙이 정해져 있을 뿐 심판에 따라 다소 좌우된다. 예컨대 한가운데로 던져진 공은 분명히 스트라이크, 땅에 튀긴 공은 분명히 볼이지만, 구석을 예리하게 파고든 공에 대한 판정은 그때그때 심판의 몫인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심판 마음대로도 아닌 게, 같은 코스의 공에 대해서는 한 경기 동안 일관성 있게 판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유능한 야구 심판은 모두가 인정하는 스트라이크 존의 공엔 망설임 없이 스트라이크를 외치고 그 언저리에서는 나름의 줏대를 가지고 융통성을 발휘한다. 그에 비해 테니스공 시절 우리의 스트라이크 존은 너무 유연했고, 운동장 시절의 "퍽" 소리 스트라이크 존은 예외 하나 없이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열기가 뜨거웠던 가을 야구를 보면서 문득 볼-스트라이크 판정과 일상의 가치 판단들이 닮아있지 않나 생각했다. 한가운데로 오는 공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어서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을 챙겨야 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같이 이론의 여지가 적은 가치 판단이 이와 비슷하다. 반면 구석으로 파고든 공은 사람마다 그에 대한 시각이 달라서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일과 연애 중 무엇이 우선일까, 아프리카 기아를 돕기 전에 우리나라의 불우이웃부터 도와야 하지 않나, 현재를 즐겨야 하나 미래를 준비해야 하나, 짜장vs짬뽕' 같이 단번에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고민 말이다.


   복잡한 고민이 나를 괴롭힐 때면 한 경기에도 수백 번 판정을 내리는 야구 심판의 자세를 생각해봐야겠다. 우리 모두가 유능한 야구 심판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각자 가치 판단에 있어서 나름의 줏대를 가지고 융통성을 발휘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물론 어린 시절의 동네 야구처럼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내가 결정해야 할 문제를 타자, 야수와 토의해서 정한다든가, 아예 예외 없이 "퍽" 소리에 의존해 융통성의 창을 닫아버리는 실수도 할 것이다.


   실수해도 괜찮다.

   엉터리 규칙과 서툰 솜씨로 매일 하던 동네 야구가 이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심어준 것처럼 아직 어설프지만 나름의 스트라이크 존을 만들어가며 어른이 되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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