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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곤 Oct 30. 2017

너는 나, 나는 너

사람과 장소에 남은 나의 흔적들

2017. 05. 제주


   '나'는 내 안에만 있을까? 도서관에 수 만 권의 책이 주제별로 꽂혀 있는 것처럼, 오래된 노트북 속 이런 저런 사진이며 음악이 폴더마다 저장되어 있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도 이 사람 저 사람,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흔적으로 흩어져 있는 건 아닐까.


   꿈만 컸던 고3 시절의 나름 순수했던 나는 아직도 책벌레인 친구 A에게 남아있고, 매일이 술로 절여졌던 스무 살 안암동 시절의 나는 그때의 절친 B에게 남아있다. 그래서 잊고 지내던 친구를 만나는 일은 잊고 지내던 과거의 나와 재회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마주 보는 그때의 나는 때로는 지금의 나를 격려하기도 하고, 때로는 왜 나를 잊었냐며 무섭게 경고하기도 한다. 때로는 나도 잊고 지내던 내 기억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오랜 기간 만난 횟수가 적은 친구일수록 그에게서 고스란히 화석화된 '그때의 나'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동안 내게 일어난 크고 작은 변화를 아직 그는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를 자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나를 잘 아는 친구라면 왠지 지금의 나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있어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바람도 있다.


   장소에도 내 흔적을 담아두는 힘이 있다. 장소의 경우에도 어느 시점 이후로 자주 가지 않은 곳일수록 '그때의 나'를 잘 기억하는 듯하다. 나에겐 고등학교 3년을 보낸 전주가 그렇고, 시끌벅적한 스무 살의 배경인 안암동이 그러하며, 세 번이나 갔는데도 오사카성은 구경도 못해본 오사카가 그렇다. 그런 곳에 가면 역시 그곳을 자주 찾던 그때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곳에서 겪었던 특별한 일은 물론이고 그곳에서 어떤 생각에 빠져 지냈는지도.


   뒤집어 생각하면 나 자신 역시도 내가 알고 지낸 모든 사람들, 가본 모든 곳들이 내게 남긴 흔적이 총합일지도 모르겠다. 생각, 말씨, 습관, 사소한 취향까지 어느 하나 오롯이 내 것인 게 없다. 술 취하면 더 마시는 술버릇은 스무 살 무렵 숱한 술자리에 함께 했던 술동무들로부터, 계란 부치는 냄새와 오토바이의 기름 냄새가 섞인 오묘한 공기를 좋아하는 것은 방콕에서 보낸 며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햇볕 아래서 하루를 보내면 살갗이 점점 어두워지듯이, 사람과 장소는 나에게 알게 모르게 계속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때로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만날 '여행 가고 싶다' 하면서도 막상 집을 나서기가 귀찮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엔 집을 나서 멀리 떠나고, 사람들 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곧 그들이요 그들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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