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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곤 Nov 03. 2017

순응하는 사람들과
2017 노벨 경제학상

<넛지>와 노벨 경제학상 수상의 숨은 공로자들


   <넛지Nudge>의 저자이자 행동경제학자인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 교수가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중·고등학교 때 '청소년 권장도서' 느낌으로 많이 읽혔던 책이기도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든다. 오래전 읽은 터라 자세한 내용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넛지>의 핵심은 이렇다. 초기 설정값(디폴트 값)을 적절하게 제시하면 별도의 제한이나 규제가 없이도 바람직한 행동과 선택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넛지>에서 다뤄진 내용을 비롯해 경제주체의 '제한적 합리성'을 꾸준히 연구하여 '행동금융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 노벨위원회가 그를 수상자로 선정한 배경이다.


탈러 교수의 연구와 수상 배경 및 소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뉴스 기사를 참조하자.

수상자 발표 직후의 탈러 교수 ⓒThe Times


   "한국 골프장 수준에 굉장히 만족했다" "골프장 캐디조차 내 책(넛지)을 읽었다 해서 놀랐다"고 밝힌 골프 덕후 탈러 교수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며 '골프장 캐디도 읽은 그 책', <넛지>와 관련된 내 야매 이론을 펼쳐보고자 한다.



'순응파'와 '행동파'


   나의 (짧은) 생각에 세상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무언가 문제나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행동파'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적응하는 '순응파'가 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생각보다 맛이 없을 때 '행동파'는 다른 메뉴를 주문한다거나, 심한 경우엔 주방장을 불러 따지는 등 그 상황을 바꾸어 나가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반면 '순응파'는 이미 주어진 상황(맛없는 음식)을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 먹는 내내 그 음식에서 그나마 맛있는 구석을 찾으려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인다. 보이지 않는 노력을 어떻게 아느냐 묻는다면, 내가 '순응파'의 일원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와 인류에 대한 나의 야매 이론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넛지>에서 탈러 교수가 주장하는 효과는 사실 사람의 성격 유형에 따라 적용 가능한 정도가 다르다. 특정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서 초기 설정값을 적절히 제시하여 '닻내림 효과'를 노리는 등 아무리 상황을 잘 설정하더라도, 행동파의 사람들은 자신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설정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순응파의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에 맞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려고 한다. 미리 설정된 조건과 상황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하는 경향이 큰 것이다.


   요컨대, '넛지'가 가장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을 순응파에게 사용했을 때이며 '넛지' 이론은 대부분의 사람이 순응파에 속함을 전제한다. 비약이 좀 (많이) 있지만, 탈러 교수의 <넛지>가 세계적인 공감을 얻고, 코리아의 골프 코-스 캐디도 읽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더 나아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의 영광까지 안겨주게 된 것에는 순응파의 숨은 공로가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순응을 거부한다면서도 남들이 입는 거 입는 '순응파 힙스터' ⓒVetements




노벨상의 숨은 공로자, 순응파는 누구인가?


   앞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넛지'에 취약한 자랑스러운 순응파이다. 조금 불만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불편을 표현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내가 따라가는 편이니 말이다. 우리 순응파의 행동 강령은 두 가지 문장으로 요약된다. (세계 인구의 반쯤을 아우르고 따를 계명도 2개밖에 없으니 세계 종교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럴 수도 있지", "어쩔 수 없지"



   순응파는 주변 사람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잘못을 해도 뭔가 나서서 그것을 비판하거나 바꾸려고 하기보단 "그럴 수도 있다"며 이해해버린다. 영 이해가 안 된다면 체념해버린다. 그리고 주변 상황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든 간에 내가 바꿀 수 있다는 건 없다는 믿음의 선언으로 "어쩔 수 없지"를 외친다. 반대편에 있는 행동파에게는 이런 삶의 자세가 무르고, 우유부단하고,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이 뭐 "그럴 수도 있고",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쩔 수 없지" 않나.

"어쩔 수 없지"


   순응파의 일원으로서의 자기변호 일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지"와 "어쩔 수 없지"의 장점은 무궁무진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사회생활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무기력감에 이 두 행동 강령은 만병통치약처럼 작용한다. 게다가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기대 수준도 대체로 낮아져서 행복 지수가 올라가는 효과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순응파로서 살아가는 것의 최대 장점은 어느 곳에서도 적응력이 좋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수도 있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지구 상의 어느 척박한 오지에 떨어뜨려놔도 큰 불만 없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예를 들자면, 밤 기온이 25˚C를 넘나드는 방콕의 가정집에서 허름한 수도꼭지로 샤워를 해가며 지낸 하룻밤이나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태국 국경도시까지 나오는 완행버스에서 버텨낸 15시간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어쩔 수 없지"의 산 증거이자 결정체였다.


   이렇게 놓고 보니 여행이라는 일 자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동파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순응 파적인' 활동이다. 떠나는 계기에는 일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적극적인 행동이 있었겠으나, 여정의 대부분은 그곳의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것이 차지한다. 여행이 하고 싶으나 이국의 환경이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진성 행동파 추종자들은 힐튼, PIC, 홀리데이 인 등의 각종 호텔/리조트 체인을 전 세계 곳곳에 세우는 것으로 문제를 적극 해결하였다. 캄보디아 씨엠립 같은 주요 관광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광객용 한식당 또한 현지에 적응하기보다는 자신에게 편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간 결과다.


   몰디브에 신혼여행을 가면 리조트 직원을 제외하고는 몰디브 현지인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리조트로 향하고, 리조트 안에 있으면 주변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경치 좋은 곳에서 편안히 휴양을 즐긴다는 목적에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그것을 순수한 의미의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 물론 저도 호텔이나 리조트 좋아합니다. 자본주의 만세)


적응하는 여행의 최고봉 ⓒDiscovery Channel




   노벨상 수상자는 세계 곳곳을 돌며 강의를 하게 되는데 그 강의료로만 수십 억 원을 벌어들인다고 한다. 물론 이전에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석학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이곳저곳 안 가본 곳이 없었겠지만. 아무쪼록 탈러 교수가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넛지>의 성공과 노벨상 수상에는 '순응파'의 숨은 공로가 있었으며 그가 주장하는 '비합리적 경제주체'가 가리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순응파라는 사실 말이다.


   탈러 씨는 수상 이후 부쩍 잦아질 출장길에서 그가 묵을 대형 호텔들이 사실은 '행동파' 추종자들의 전진 기지라는 점 또한 알았으면 한다. '넛지' 효과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주어진 조건을 주도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그들보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순응하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임을 잊지 말기를.


   만약 서울에 오게 된다면 남산 아래에 있는 고급 호텔에 묵을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 초대하면 영광이겠다는 별 말도 안 되는 망상도 해본다. 우리 동네에서 7770번 버스를 타고 매일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을 함께 해보면 더욱 좋겠다. 수도권 과밀현상과 서울의 높은 집값이라는 암울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경기도민의 애환을 나누고, 출퇴근길 교통난을 타개할 '넛지'를 설계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교수님?



*Richard Thaler의 한글 표기는 "리처드 탈러"와 "리처드 세일러(thㅔ일러?)"로 아직 통일되지 않은 듯합니다만, "리처드 탈러" 쪽이 검색 결과가 더 많아 이쪽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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