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자입니다
한국에서 문화예술 분야, 특히나 사진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취미로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도 생계로는 선뜻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통장에 얼마가 들어있고, 좋은 집에 사는 부자가 될 수는 없어도 부자의 삶은 살 수 있겠다고 말이죠. 실제로 저는 시간 부자, 경험 부자입니다.
6년 전 쯤, 김중만 선생님 밑에서 사진을 배우던 때의 일입니다. 주말에 시간이 되느냐는 지인의 연락을 받고 수원에 갔습니다. 아이들 몇 명과 축구선수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열 두 살의 난치병을 가진 아이가 오래도록 품어 온 꿈을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두 번에 걸친 심장 수술 탓에 10분 이상 달리는 것도 무리였지요.
그렇지만 수원 삼성 축구팀은 아이를 위해 경기를 열었고 아이는 TV에서만 보던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힘껏 뛰었습니다. 쉴 새 없이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이것이 제 부자로서의 삶에 첫 번째 경험이자 메이크어위시 재단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기부. 참 어려우면서도 쉬운 단어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기부를 할 수 없다고 여겨 왔습니다. 수입도 일정치 않고,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작은 돈이나마 꺼내어 놓는 것이 당시 저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그 기부를 강요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 카메라 들고 와서 셔터 한 번 눌러줘'라는 말을 듣고 정작 가보면 일로써 해야 할 것을 재능기부라는 명목으로 강요받을 때가 있지요.
그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와! 내가 사진을 하니까 이런 좋은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찍은 사진을 전해 줬을 때의 아이와 부모님의 미소가 아직도 제 눈가에 남아있습니다. 거꾸로 제가 부탁했습니다. 언제든 아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기록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저를 불러달라고. 덕분에 공주님이 되는 날을 함께한 아이, B1A4와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하는 아이, 목포에서 공룡 화석을 만난 아이, 제주에서 인어가 된 아이 등 다양한 친구들의 모습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겨울 왕국의 엘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는 옷을 입혀서 사진을 찍고 영화 포스터에 합성을 해서 선물하기도 했고요. 그런 날 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해 재단에서는 그동안 재능기부 해 온 사진가들과 함께 아이들의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어 전시를 여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전시 첫날 제가 출품한 다섯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 중 넷이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했습니다. 나머지 한 친구는 시험공부를 하느라 오지 못했다네요.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사진이 이렇게 아이들과 그 부모님의 삶 한 켠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마음만 부자가 되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크로아티아에 촬영을 가야 하는데, 항공권이 필요했고 몇 달 간 수입이 적었던 저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몇몇 항공사와 잡지사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다 터키항공에서 흔쾌히 손을 잡아주었고, 촬영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홍보를 담당하는 차장님은 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습니다. 단지 항공권을 제공하고 후기와 사진을 받는 정도가 아닌, 더 의미있는 일을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큰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취항지가 많으니 사진가 몇 명이 가서 담아온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어 수익이 생기면 기부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사진도 좋지만 더 재미있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어서 숙고 끝에 음악가와 화가 한 명씩을 추천했습니다. 그렇게 김물길 작가와 프롬이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회의 첫날, 이제 막 취항하기 시작한 쿠바 이야기가 잠시 나왔습니다. 김물길 작가는 어느 곳보다 쿠바에서의 기억이 좋았다며 꼭 다시 가기를 원했습니다.
엽서만으로 끝내기는 아쉬우니 전시를 하자고 했습니다. 물론 그 의견은 좋지만 만만치 않은 제작비와 대관료에 항공사는 주저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의 새로운 기획과 취지에 공감해 주신 캐논에서 공간을 지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혀 모아지지 않을 것 같은 인연이 한데 모여 어떤 결과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지 모르는 문화예술이 실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가 언제 한 번 가볼까 생각하는 쿠바라는 나라를 다양한 아티스트의 시각으로 눈 앞에 펼쳐 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그렇게 마주한 전시의 기쁨을 모아 난치병 아이들의 꿈을 이뤄 준다면 더욱 멋지리라 생각합니다.
다가오는 여름, 저희는 여러분과 뜨거운 인연을 맺고 싶습니다.
함께 해 주실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