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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Oct 15. 2018

면접을 봤다.

젊은이도 어른도 아닌 애매한 나이


9년 전 면접을 봤다. 생에 유일한 면접 경험.
강북에서 제일 높은 건물에서
제일 별 볼일 없는 학점과 스펙을 들고 면접을 봤다.
이른바 ‘야생형 인재’를 찾는다는 슬로건으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젊은이들을 찾아 입사시키는 전형이었다. 세계일주, 한복같은 흔치 않은 이력에 선발을 해 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꿈의 스펙트럼에 있으니 패스.


지난주 면접을 봤다. 같은 건물에서.
20대 젊은이들에게 여행을 보내주는 프로그램
‘0순위 여행’
늘상 1순위에 치여사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원래의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만의 0순위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취지였다.
예전 G마켓 해외봉사단, 경기 문화재단 등등에서
면접관으로 몇 번 참여했던 터라 신선하고 통통튀는 생각들을 만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기대는 첫 날 두 번째 면접자부터 무너지기 시작해
점심때가 되니 정신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심사가 어렵거나 언쟁을 해서가 아니라 애들이 하도 울어서.



스물 셋에 삶이 너무 치열하고 고단해서 여행 같은 것은 꿈꿔보지 못한 친구,
스물 여덟까지 합격문자라는 걸 단 한 번도 못받아보고 이번에 처음 면접에 와 본 친구.
관광학과를 나왔는데, 아버지의 건강때문에 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친구.
물론 선발의 취지에 적합한 사람을 서류통과시켰으니 유독 그런 사연의 비율이 많았을테고,
발랄하고 진취적인 친구들도 충분히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이틀간 만난 60여 명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주눅든 젊음’이었다.


소위 청춘, 열정, 도전 등으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짧게나마 현실을 한 번 벗어나보고자 하는 소망, 자신을 찾고자 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망설임이 보였다.
'어디든 갈수 있는'이라는 문구와 달리 그들이 가진 생각의 지평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결코 부족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누구보다 영상을 잘 만들고, 섬세하고, 아이디어도 있고 발표준비도 잘 하는
보통의 대학생 또는 젊은이들.


나의 삶을 관통하는 맥락은 ‘경험’이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긴 시간 경제활동을 못한 채 방황했다. 하지만 나름의 생각이 있었고, 자신이 있어 밀고 나아갔다. 허나 그 아이들 앞에서 이런 소리는 정말 배부른 얘기가 된다.


다양한 삶을 보고, 직접 시스템 밖으로 나가서 살아보려고 노력한 경험. 그것이 되려 우물이 되어 현실을 제대로 못 본 것은 아니었을까. 여행자들이 주변에 많으니 여행을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건 아닐까.
애쓰고 노력해서 도전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믿음따위가 6년째 주변 눈치보며 취업준비만 하고 있는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닐거다. 진학이나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활동은 여유가 없는 자에게 그 자체로 사치다.
죽도록 애써서 얻은 결과가 ‘생존’ 수준에 머문다면 그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틀간의 면접이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아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그리 깊은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려줘서 내가 고마웠다.
어디가서 열 살 넘는 나이차의 아저씨에게 긴 시간 자기 속 얘기를 하겠는가.

면접관으로 있기에도 아직은 너무 미성숙한데 말이다. 불과 몇 년전 선배세대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책임을 묻던 내가 지금 그 자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덕분에 생각의 방향에도 조금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용기내어 말해준 아이들 모두 원하는 여행을 보낸다면 좋겠지만 떠나는 친구도, 그렇지 못한 친구도 모두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SKT가 어떤 회사인지는 모르겠다. 요샌 멤버십 할인도 별로고. 실제 이번 면접일 외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회사의 의사결정권자 누군가 과거의 나를 인정해준 것도, 현재의 아이들에게 용기를 준 것도 참 고마운 일이라 생각한다.


한동안 긴 글을 쓸 마음의 여유도, 추진력도 없었다. 여기 브런치에 남겨둔 내용처럼 지난해 전시 이후 고민이 좀 많았다. 또 정말 미지근한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꼭 필요한지, 여행이 과연 무슨 의미를 주는건지.

그렇지만 내게 주어진 소명을 세상에 더욱 필요한 가치로 다듬는 작업을 시작해야겠다.

생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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