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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랴 Nov 28. 2020

딜레마

사소한 감기나 배탈로 병원에 들르면 마트에 갈 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접근하게 된다. 과자 한 봉지를 살 때는 그렇게 비교를 해보는데 말이다. 내 입맛에 맞을지도 생각해보고, 할인행사는 하고 있는지, 비슷한 맛을 먹어본 적이 있는지, 옆 마트가 더 싼 건 아닌지, 저쪽 편의점에서는 1+1 행사 중은 아닌지까지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병원은 절대적이다.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아픔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대로 따르게 된다. 의사의 치료나 처방은 절대적이다. ‘옆 병원이 더 싸서요’ 라거나 ‘저 병원 약이 더 싱싱해요’라고 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치료의 세세한 원리나 약의 성분까지 기억하는 보통 사람은 드물다. 병원에 도착한 순간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접수와 수납뿐인걸. 구체적인 사유가 있거나 의료 지식이 해박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진통제를 처방하는지, 어떤 치료가 내게 필수적이고 어떤 치료는 과잉인지, 알 리가 없다.


개인 병원은 이윤을 추구하며 처방과 진료는 이윤을 추구하는데 활용되는 서비스이다. 아파 죽겠는데 의사가 어떤 치료를 원한다면 비용에 상관없이 건강을 우선에 두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대부분의 환자들은 깜깜한 밤길을 걷는 듯한 이들이다.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서 더듬더듬 찾아온 이들. 의사는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역할이다.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도 치료가 통증을 완화하고 상태를 좋게 한다면 환자 개인은 스스로 비용을 감당하려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위안을 위한 소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픔을 줄이는 대가로 지불하는 돈에 대해선 건강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관대해지곤 한다. 사실은 공포를 막기 위해 내는 비용 인지도 모른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나는 줄곧 의사가 하잔대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주 단위로 주사를 맞고, 주에 몇 번은 도수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았다. 병원에 들를 때마다 처방전을 받아갔고, 진통제와 근육이완제를 복용했다. 하란대로 하고, 내란대로 냈다. 얼마나 이 패턴을 반복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명절이 되자 병원에서 내 이름으로 홍삼이 한 박스 택배로 왔던 것을 기억한다. 병원 단골이라는 의미겠지. 연말 정산의 의료비 항목을 확인하고는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뒷 목을 잡았다.


언젠가부터 병원 영수증에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다. 비급여. 병원비가 내 예상보다 많이 나온 날에 도드라지게 보였다. 몇만 원으로 시작한 치료비가 순식간에 이십만원을 넘어가기도 했다. 새로 MRI를 찍을 때는 몇 십만원도 금방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비급여의 형태로 권하는 치료의 경우 환자에게 필수적일 경우보다는 병원의 이윤을 위한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병원을 유지하고 사업체로서 운영하기 위해서는, 보험이 적용되는 치료만 해서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허리 치료에 있어서 검증된 방법은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단다. 많이 쉬고, 필요한 경우 진통제를 먹고, 주사 치료를 통해 근육의 긴장도를 풀어주거나 신경의 염증을 완화시키는 것 정도. 어느 때에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 결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사의 몫이다. 나는 처음엔 의사도 이윤을 추구할 것이란 생각을 못하고 줄곧 하잔대로 했다. 의사는 전문가이고 나는 비전문가이니까, 조언을 따르는 게 무조건적으로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도 의사이고, 소비적 주체도 나였다. 내 돈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니까.


병원에 갈 때마다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치료받는 것이 합리적인가.  나는 정말 아파서 계속 치료를 받는 걸까, 의사가 계속 치료를 받으라고 해서 받는 걸까. 의사는 필요해서 권하는 걸까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권하는 걸까. 둘 다라면 그 중 어느 쪽의 비율이 더 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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