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선 Jun 22. 2019

진정한 콜라보레이션은 무엇인가

호안 미로의 세라믹을 제작한 카탈루냐, 아티가스 작업실


미술작품에서 얻는 감동은 여행에서 얻는 감동과 비슷하다.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작품 앞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경험함으로써 그 작품이 내 시간으로 들어오게 된다.

스페인에 가 보기 전에는 호안 미로의 작품이 왜 그렇게 천진난만하며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색을 띠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천재성은 회화, 조각뿐 아니라 다루기 어려운 재료인 세라믹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미술사학 책에서 어찌저찌하다고 배우긴 했으나, 어떤 환경 속에서 이런 작품이 나오는지 책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작업장 꼭대기 다락에 있는 스케치실, 모든 기물이 무심한듯 그러나, 제자리에 놓여있다.

 

 201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유네스코의 도예유리 자문기구인 International Academy of Ceramics (이하 IAC)  총회에 참석하는 기간 동안 서서히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총회는 "어디의 누구입니다"라고 내 이름보다 직장명이 먼저 나오게 하는 달콤한 족쇄와 같은 미술관 큐레이터를 사임하고 IAC 개인회원으로서 임명장을 받는 자리인지라 내게는 더 특별했다. 출장 일정이 빠듯한 직장인 시절에는 엄두도 못 내던 학회 일정 후 포스트투어에 친정엄마까지 함께 참가하게 되었으니 더욱 기대가 컸다.


1954년부터 2년마다 개최국을 바꾸며 열리는 IAC 총회는 전 세계 도자 관련 작가, 미술관, 컬렉터가 한 자리에 모이는 국제회의이다. 시의성 있는 주제를 가진 학회와 참여 작가들의 릴레이 전시 오픈에 이어 마지막은 개최국의 도자예술을 잘 보여주는 세라믹 스폿 투어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행사이나, 유서 깊은 이 행사의 개최는 국가의 명예로 여겨져 국가차원의 지원과 세라믹 커뮤니티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늘 풍성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도자를 테마로 한 이 심도 깊은 예술여행은 세계 최고의 도예가들과 함께 어디 가나 VIP 대접을 받으며 작가의 작업실, 미술관, 역사유적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IAC 바르셀로나 컨퍼런스 주제는 " Ceramic in Architecture and Public Space, 환경미술에서의 도자예술"이었다.

바르셀로나 시내의 건축물 외벽에 사용된 도자타일전시, 바르셀로나 디자인뮤지움을 돌아보는 공여사님

하루 종일 이어지는 회의와 전시 오프닝이 첫 주에 계속되었다. 사실 나와 엄마는 소문으로만 듣던 카탈루냐 예술가들의 넘치는 열정을 따라가지 못해서 몸이 힘들었다. 매일 저녁밥은 오후 10시가 넘어서 나오고, 컨퍼런스장 에어컨은 왜 이리 센지, 나이 지긋하신 IAC 회원들과 함께 감기에 걸려 골골했다. 솔직히, 바르셀로나 시내 가우디의 현란한 구조물은 내겐 멋진 구경 이상의 감동을 주진 못했다. 일주일쯤 지나 버스 뒷자리에 앉은 스페인 작가의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유쾌한 수다에 익숙해질 즈음, 나는 호안 미로, 피카소의 작품뿐 아니라 바르셀로나 시내 건물을 장식한 대형 도자벽화를 만들어내는 수많은 스튜디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바르셀로나 북쪽 마을 미술관에 전시된 로마시대의 타일

반세기 전에 미로의 작업장에서 일을 거들던 어린 소녀였던, 지금 80대의 나이에도 풍성한 빨간 머리를 땋아 내린 소녀 같은 도예가가 했던 흑백사진이 주조를 이룬 프레젠테이션. 50년 전에 스페인에서 IAC 총회를 개최할 때 스텝이었던 도예가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명예회원으로 박수를 받는 장면에서, 로마시대의 타일 옆에 바실리 체어가 아무렇지 않게 놓여있는 마을 갤러리를 돌아보며 우리는 점점 이 곳에 젖어 들어갔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근교, 호안 미로의 세라믹 작품을 만들던  아티가스가문의 영지에 도착해 숲길로 걸어 들어가면서 드디어 나는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바르셀로나 근교 아티가스 작업실로 들어서는 길

 이번 학회의 주요 토론 주제는 순수 미술가와 그 작품을 만들었던 제작소와의 관계였다. 유명한 작가와 제작 스튜디오와의 협업은 미술사에서는 크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오히려 외주 등 종속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자는 예외적으로, 재료과 기법의 특성상 아이디어만으로 완성품이 나오지 않는, 우연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예술이라 도예가의 의지와 기술이 최종 작품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특히, 도자기 기물을 캔버스처럼 소극적으로 활용했던 피카소와는 달리, 호안 미로의 세라믹 작업은 형태, 크기, 기법이 매우 다양해 도예가의 역할은 더욱 확장된다. 무엇보다 미로의 작품처럼 무심한 듯 천진한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구현되기 위해서는 세라믹 스튜디오와의 호흡과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터이다.

이런 합리적인 짐작을 뒤로하고서라도 방대한 대지에 레지던시, 미술관, 가마, 스케치, 성형실을 갖춘 아티가스 작업장은 어떤 것을 미로가 만들고 어떤 것을 아티가스가 만들었는지 구분 짓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다. 무겁지만 않다면 집으로 하나 들고 오고 싶을 만큼 예쁜 토분에 심겨있는 제라늄에도 감탄하며,

벽돌 하나하나의 색깔과 비례, 건축방식 모든 것이 딱 적절히 만들어진 작업실로 들어섰다. 잘 가꾸어진 대나무 숲과 청량한 산의 기운이 그대로 전개되는 작업실에 앉아 이 풍경을 마주했을 수많은 예술가들을 생각해 본다.

유약 안료, 도구들이 모두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았던듯 정돈된  1층, 2층 작업실을 올라 꼭대기 다락에 스케치실에 들어섰다. 누가 설명을 해 주지 않아도 벽에 액자도 없이 걸린 그림이 대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좀전에 누군가 앉았다 일어난 것 같은 붉은 의자와 세트처럼 걸린 그림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작업장이 추구해 온 바를 보여주는 설계도 같았다. 적어도 수십 년 전에 그려진 것 같은, 비정형의 날아갈 듯 자유로운 이 스케치가 우리가 방문한 날에 육중한 흙으로 구현되어 가마 속에서 구워져 나오고 있었다.

호앙미로 미술관에 전시중인 1982년작 호안 미로의 세라믹작품 "여자와 새"

이는 호안 미로와 아티가스의 협업이 한 번의 프로젝트가 아닌, 수년 동안 큰 줄기를 이루며 실행되고 있는 콜라보레이션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예술가의 번뜩이는 천재성에 명작으로서의 내구성을 더해주는 제작 스튜디오의 진중한 협업이 한 세기가 다 되도록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아티가스작업실을 거쳐간 것은 호안 미로 만이 아니었다. 카탈루냐 자연환경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은 아티가스 작업실의 가장 많은 공간은 레지던시 작가를 위한 숙소가 차지한다. 건물 곳곳에서 이 곳을 스쳐간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마주칠 수 있다.


세계각국에서 온 동료 도예가들에게 가마 문을 열어 보여주는 아티가스의 작업자

성공적인 협업을 하려면 각자의 분야에서 넉넉한 실력을 이미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 말은 쉽다. 그러나 실제는 협업이 양측의 입장에서 모두 성공하는 예는 드물다.

사실 나부터도 번뜩이는 창조성에 더 무게를 두고, 한 사람의 주인공만을 중요시해 왔다.

그간 내가 진행한 순수 예술가/ 디자이너와 도예가의 콜라보레이션 경험을 떠 울리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우선, 초기 아이디어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나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원인은 생각과 행위의 주체가 다른 데다 자연물을 재료로 하며 불이라는 소성과정을 거치는 도예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또한, 스타 디자이너의 유명세에는 큰 돈을 지불하면서도 제작 스튜디오를 하대하던 갤러리 오너들. 멋진 세라믹 작품을 만들어 달라면서도 흙이라는 재료를 사용해 불에서 구워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세라믹 본연의 변수를 방해 요소로만 여기명서, 달랑 3D 이미지만 이메일로 보내오던 유명 디자이너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작업에서 불확실성의 변수를 통제할 수 없으면서(사실 불을 완전히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며,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발주자에게는 해 낼 수 있으리라 호언장담 하던.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작업실의 도예가들. 자신의 모든 경험과 미적 감각을 동원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던 그들이 생각났다.

 

아티가스 미술관에 전시된 유명 예술가들과의 콜라보작품들

하늘 아래 새로운 것들이 고갈되어 가는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려면 협업은 늘 필요하다. 미로나 피카소의 경우처럼 유명한 예술가들의 세라믹 작품은 쉐도우 라이터와 같은 알려지지 않은 도예가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완성작의 성패를 결정하는 전체 형태, 물질성의 표현에서 도예가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지만 작품이 잘 나왔다 해도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의 기대치가 처음부터 다른 이 작업은 의가 상해서 끝나는 경우가 태반이라 도예가들은 이를 꺼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수세기 동안 한다 하는 예술가들은 세라믹 특유의 매력에 빠져 불나방처럼 이 콜라보레이션을 포기하지 못했다. 도예가들 역시, 재료의 한계를 벗어난 신선한 생각을 찾아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세상에 없었던 물건(사실 예술작품도 물건임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00년대 문화계 최고의 트렌드인 콜라보레이션은 가장 어려운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이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은 봉황처럼 허상인지도 모른다. 그 많은 실패를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카탈로냐 산속의 아티가스 작업실에서 이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넉넉한 실력을 갖추고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작업이 될 때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멀리서 온 손님들을 위해 아티가스씨가 피운 벽난로의 장작 타는 냄새가 저녁 무렵, 산속의  차가워진 공기를 은근히 감싸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 와 본 곳을 이미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내 인생의 그림을 마주하고 할 말을 잃었던 그 순간만큼이나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큐레이터의 여행. 작업실방문기.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