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글을 쓰는가
희미한 물소리에 눈을 떴다.
낯선 곳이다.
어제 여행을 온 것을 깨닫는다.
넓고 하얀 침대에서는 아홉 살 딸이 쌔근쌔근자고 있다.
아침비행기를 타고 이 곳에 도착했었지.
전투적으로 짐을 싸고 혼잡한 두 개의 공항에서 벗어나 인테리어는 물론 로비에서 나는 냄새까지도 세심히 디자인된 호텔에 도착했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수영장에 둥둥 떠서 아이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공항 에스컬레이터에서 비행 6시간을 내리 떠들던 단체 여행객들 중 하나가 떨어뜨린 가방에 맞기까지 했으니 아이의 스트레스는 말로 다 할 수 없었겠다.
왜 글을 쓰는가 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었다.
어제까지의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의 집중된 업무와 혼란이 아니더라도 두 아이를 낳고 나서 계속 내 정신은 그랬다.
낯선 곳에서 새벽에 깨서 노트북이 얌전히 놓인 책상을 마주하니 비로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합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쓴다.
분초를 쪼개어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나도 모르게 시간과 돈을 아끼기 위한 최대한의 가성비를 추구해 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최저가 검색을 숨쉬듯이 하면서도 사실 나는 가성비라는 이 말을 싫어했다.
내가 살면서 소중하게 생각해 온 모든 형이상학 적인 것들과 내 감정까지도 경제논리에 매몰시켜 버리는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점 자투리시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인 검색이 허전함을 대신해 가며, 나는 한 문장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여덟 살 때, 일기장에 동화를 한 편 썼다.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담임선생님은 정말 혼자 쓴 것이 맞냐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자랑스럽게 공책을 내밀었지만 엄마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드미지근했다.
말수가 별로 없던 엄마는 좋은 글은 감동을 주는 글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써야한다 는 말을 하셨던 것 같다.
나는 단번에 이 일이 매우 어려운, 하려고 하면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 견딜수 없는 그런 종류의 고난이 따르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철들고 나서 이런 걸 창작의 고통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마음의 진실들로 이루어진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쓰고 싶었다.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욕망은 늘 내게 따라다녔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글을 시작한 지 한 달만에 돌아보니
나는 정보성 글을 써야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내가 아이를 재우고 검색에 열을 올릴 때 만족감을 주는 정보가 그런 것들이어서였던지.
내 글도 누군가에게 유용한 정보가 되어야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사실, 그런 글은 내가 쓰고 싶은 글도 잘 쓸 수 있는 글도 아니었다.
누가 썼는 지 기억조차 할 수 없고 서로 원하는 정보만 얻으면 끝이었다.
나는 보다 똑똑하게 내 인생을 소비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를 멈추기 위해 글을 쓴다.
SNS는 물론 핸드폰도 없는 내 친구가 생각난다.
전시를 위해 프랑스에서 온 그와 안숙선 명창의 공연을 함께 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말도 모르는 친구와 함께 눈시울을 적셨던 그 감동을 남기고 싶어 sns를 찾던 나는 문득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가면을 쓰는 데 드는 시간을 아껴 우리가 같이 보낸 순간을 음미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물질은 물론 정신까지도 효율적으로 운용하려고 하는 가성비의 톱니바퀴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
아무 목적도 없이 내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조금 더 바란다면 어린 내게 엄마가 말해주셨던
진실한 문장 하나를 건져 다른 이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
아이가 깨서
엄마 나 뭐하고 놀아 하고 묻는다.
다시 혼자 있는 시간은 잠깐 끝이다.
그래도 여행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아이와 함께 남이 해 준 밥을 먹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