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엄마의 말레이시아 한달살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세 번째 방학을 맞았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키고 나서 오늘도 Grab을 타고 미술관을 찾는다.
이 곳 쿠알라룸푸르는 말레이시아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태국 등 남아시아 미술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싱가폴이 이미 유명해진 남아시아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준다면, 말레이시아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전 단계에 있는 좀 더 젊고 다양한 작가, 지역예술가들을 만나 볼 수 있는 다이나믹한 곳으로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처음 발리와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아시아 미술을 접했을 때 보기만 해도 흙먼지가 일 것 같은 그러면서도 묘하게 몸을 잡아당기는 듯한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갈색이 반복됨을 느꼈다. 이 갈색은 주변의 온도를 5도는 낮춰줄 것 같은 푸른색과 종종 함께 나온다. 여행하는 동안 나름 멋지다고 생각한 장면에 셔터를 눌렀으나, 나중에 핸드폰 화면은 온통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SNS에 올릴만큼 쌈박한 사진을 건지기가 참 힘들었다.
땅으로 향하는 무거운 색채를 담은 이 동네 작품들은 놀랄만큼 공을 들인 디테일과 함께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방인인 내게는 더 복잡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때로는 가격대비 멋진 작품을 발견해서 한국으로 가져가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으나, 서늘한 톤의 작품을 집으로 가져갔을 때 기존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어 선뜻 구입하지 못했다. 나의 시각이 이미 소위 심플하고 청량한 스칸디나비아식 정갈함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걸작은 통한다고 했던가. 쿠알라룸푸르에서 손꼽히는 말레이시아 미술 컬렉션을 자랑하는 국립은행 미술관 Bank of Negara Museum 에서 마주한 이 작품에서는 이 갈색톤에 조금 친근감을 가질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거장 Yong Mun Sen의 대표작으로 한 치의 방만함도 없는 잘 짜여진 수직구도로 화면을 분할하며 갈색과 회색의 모노톤을 수묵화처럼 적절히 사용한 작품이다. 1946년의 어느 날 작업이 한창인 항구의 모습에서 열대의 흐린 날씨와 탁한 남아시아 바다 특유의 묵직함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이 정도면 내가 알고 있는 미적기준에 모두 부합하면서도 이 나라 특유의 색채를 잘 담고 있으니 여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다시 일햄미술관에서 본, 얼굴을 가린 옷에 바틱기법의 문양을 가득 새긴 이슬람 여인을 그린 이 대형 걸개그림을 보고는 그 미적 급진성이 가져다 주는 이질감에 잠시 얼떨떨했다. 이 그림 속에는 수행하고 있는 듯이 작업하는 작가의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그대로 보인다. 서구화된 미적 원칙에 전혀 맞지 않는 이 작품을 보고 있자면 종교적인 수행을 그대로 드러낸 종교미술을 볼 때와 같은 경외감마저 가지게 된다.
쿠알라룸푸르는 잘 개발된 대도시이지만 한 걸음만 나서면 열대의 숲이 우거져 있어 이방인을 당황하게 한다.
한달을 지내보니 미술작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은 미술작품 뿐 아니라 사람들의 옷, 전통문양, 건물, 공기에서도 느껴졌다. 아홉살 아이는 한 달살이가 일주일 남은 지금도 매일 밤 땅거미가 내릴 때쯤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두려움을 호소한다. 낮에는 활기차게 잘 놀고 새로운 친구들과 즐겁게 보내다 단 둘이 있는 밤이 되면 우리는 이 Damansara 지역의 땅이 뿜어내는 강렬한 기운에 주눅이 든다. 낯선이들의 무수한 육체와 정신이 뿜는 그 에너지에서는 홍콩, 런던, 뉴욕 그 어느 대도시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무거움이 느껴진다. 수영장을 갖춘 신축콘도에서 짐을 풀고 있지만, 우리는 무언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듯한 열대의 자연이 주는 강렬함을 느낀다.
낯선 산과 땅이 내뿜는 말이 기운이 무엇일까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이 기운의 표현을 알 수 있다. 서양식 디자인에서 금기시된 원색의 대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시연하면서 짙은 색 테두리까지 둘러 대담한 비쥬얼을 뽐내는 공예품들 앞에 촌스러움 보다는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교한 디테일에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에 대한 탐구를 노골적으로 노출한 이 작품들에 솔직히 상쾌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나의 미적고정관념을 부끄럽게 하는 한 작가의 작품이 있었다. 캔버스에 공들여 색을 칠하고 다시 잘라낸 조각을 묶어 설치한 이 작품은 Kamin Lertchaiprasert 라는 태국작가의 작품이다. 불교의 세계관은 Dharma 를 추구한다는 이 작가는 작업방향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말을 남긴다.
나는 장소특정적인 Site-specific 작업이 하기보다는
삶 특정적인 Life-specific 작업을 한다
어떤 공간에 멋지게 어울릴 만한 장소를 염두에 둔, 환경에 좌우되는 작품을 만들지 않고, 작가자신의 생활과 정신에서 시작된 작품을 만든다는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이 말에 숙연해 지는 이유는 뭘까. 정말 서국적인 미적 시각에서 볼 때, 완급조절이란 찾아보기 힘든 이 지역 미술이 왜 그러한지 이유를 찾은 것 같기 때문이다.
예술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불멸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담은, 특정한 용도에 봉사하지 않는 그런 피조물이 예술작품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표가 아닌가. 이 당연하지만 잊혀지기 쉬운 명제를 이 곳 작가들 작품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을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상품가치의 시각을 벗어나 예술가 자신의 종교적인 명상, 정신의 작용에 집중한 작품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아직 앳된 30대 초중반의 작가들의 작품이 놀랍도록 성숙해 있는 이유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서구화된 환경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며 바쁘게 살아온 두 아이의 엄마이자, 큐레이터인 나에게 정신성이 강조된 이 나라의 예술작품들이 주는 울림은 매우 특별하다. 차분하게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 앞에서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 가에 대한 생각을 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여행자인 내게 이런 비일상적인 시간을 선사해 준 그들에게 감사하다.
한 달살기를 와서 가장 잘한 일이 미술관을 돌아다닌 일이다.
새로운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려면 미술관에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전시된 작품 뿐 아니라 미술관의 분위기, 건물이 위치한 장소까지도 이 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딱 한 번만 큰 맘먹고 가는 것이 아니라 틈날 때마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지역예술가들이 참가하는 페스티벌을 찾아다니면 짧은 시간안에 그 나라 문화의 가장 정제되고도 다양한 샘플을 경험할 수 있다.
한국에서 여름의 초입 6월이 되어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그익숙한 온도와 습기가 이 곳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비행기표를 검색하게 만든다. 아마도 우리는 또 이 곳에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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