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사주 Oct 05. 2017

1990년대 뉴웨이브 ②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유시진

책 권수가 수입과 직결되던 대본소 시절에는 아무래도 대하서사가 많았습니다. 《불새의 늪》 《아르미안의 네 딸들》 《별빛속에》 《북해의 별》 같은 대작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가 창간한 이후 상황은 달라집니다. 일단 초대작 장편 외에 중단편이 실릴 공간이 마련되면서 일상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잡지의 주독자층이 중고등학생으로 특정되면서 학원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주/월간지의 특성 상 옴니버스 형식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발맞춰 신파가 대세였던 이전 세대와 다른 정서와 감각의 신진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중 유시진은 쿨한 세계관과 핫한 문제의식으로 동세대 독자들과 도킹한 작가였습니다. 



데뷔작| 1992년 <지난 봄 이야기>

대표작| 《아웃사이드》 《마니》 《폐쇄자》 《온》 《그린빌에서 만나요》 《신명기》(미완)



인간의, 특히 십대의 어둡고 예민하고 복잡한 심리를 파고든 작가.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다수가 결정한 상식, 관습, 통념만이 옳다고 배우던 십대들에게, 그것이 포함하지 않는 무수한 ‘소수’와 ‘옮음’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집단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 작가이기도 하다. 1971년생으로 대학시절부터 만화를 그렸고, 1990년 『르네상스』 공모전에 <유토피아 2030>을 출품해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장 데뷔하기보다는 좀더 실력을 연마하는 길을 선택했고, 1992년 『댕기』신인작가공모전에서 다시 한 번 입상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후 판타지한 설정, 개성 있는 그림, 쿨한 정서, 감각적인 스토리, 냉소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주변부 존재들의 관계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전개했다. 


유시진의 첫 장편. 고려가요 '처용가'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향후 작가가 천착하는 두 갈래 길을 예비한다.


첫 장편은 1994년 『윙크』에 실은 《마니》다. 용신족 왕녀 ‘마니’는 피비린내 나는 왕위계승 전쟁을 피하기 위해 주술사 ‘해루’와 함께 인간세계로 피신해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일개 주술사인줄로만 알았던 해루가, 용왕의 아들 ‘처용’이 인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는다. 전반부에서 고등학생 마니를 중심으로 십대의 현실과 고뇌를 그리는 데 치중했던 이야기는, 후반부에서 마니와 해루의 고독과 사랑과 고려가요 ‘처용가’에 기초한 판타지한 시공간의 서사를 구체화하는 쪽으로 흘러가는데, 이 두 갈래는 향후 유시진의 세계에 주요 기둥이 된다. 전자의 결정체가 《쿨 핫》이라면 후자의 계보는 《신명기》 《폐쇄자》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를 맺기까지 십수 년 간 연재->잡지폐간(연재중단)->다른 곳에서 재연재->또 폐간의 악순환을 견뎌야만 했다. 


1996년 『윙크』에서 시작한 《쿨 핫》은 1999년 돌연 연재가 중단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인』에 연재하는 《폐쇄자》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2000년 ‘코믹스투데이’에서 재연재에 돌입했지만 그해 불거진 ‘코믹스투데이 사태’로 인해 영영 미결로 남았다. 비슷한 시기, 《폐쇄자》를 시작하면서 중단된 《신명기》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2003년 『오후』에 연재하던 《온》은 잡지가 폐간되며 중단되었다가, 2006년 ‘코믹뱅’을 새로운 연재처로 잡아 2007년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날이 좁아지는 입지, 개성을 발휘하기는커녕 생존조차도 어려운 현실, 반복되는 연재/중단의 상황은 유시진을 슬럼프로 몰아넣었다. 


한국만화의 짧은 르네상스가 끝나고 작가, 특히 성인취향의 작가들은 제대로 된 지면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쿨 핫》《신명기》등이  멈춰 선 이유다.


죽음 같던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결국 작품이었다. 2006년 유시진은 『윙크』에 연재하던 《그린빌에서 만나요》를 3년 만에 끝맺으며 오랜 슬럼프에서 해방되었다. 그해 수상한 ‘부천만화대상’ 대상은 지난한 과거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답보상태였고, 일할 장이 없어서 교양/학습만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간간이 『팝툰』 『판타스틱』 같은 잡지들에 중단편을 냈다. 《순애보4》 작업에도 참여했다. 가끔 연재 기회를 잡기도 했는데, 세계를 채 펼쳐 보이기도 전에 잡지가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또다시 《푸른 목걸이》와 《월흔》이 멈춰 섰다. 


근작은 2015년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 순정만화특집”의 <꽃밭에서>. 그림체는 얼마간 변했을망정 감각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1990년대 뉴웨이브 ①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나예리, 박희정


1990년대 뉴웨이브 ③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천계영


1990년대 뉴웨이브 ④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권교정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 만화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