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나예리, 박희정
책 권수가 수입과 직결되던 대본소 시절에는 아무래도 대하서사극이 많았습니다. 《불새의 늪》 《아르미안의 네 딸들》 《별빛속에》 《북해의 별》 같은 대작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가 창간한 이후 상황은 달라집니다. 일단 초대작 장편 외에 중단편이 실릴 공간이 마련되면서 일상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잡지의 주독자층이 중고등학생으로 특정되면서 학원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주/월간지의 특성 상 옴니버스 형식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발맞춰 신파가 대세였던 이전 세대와 다른 정서와 감각으로 무장한 신진작가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나예리와 박희정은 곧 그들의 대표 이름이었습니다.
데뷔작| 1994년 <흐르지 않는 시간>
대표작| 《네 멋대로 해라》 《피터 판다》 《달에서 온 소년》(미완) 《럭키맨》 《1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1990년대의 기수. 시원한 선과 매력적인 그림, 호방한 감성과 담백한 연출, 평범한 개인의 사사롭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웅장한 서사와 연출로 승부했던 이전 세대들과 차별화했다. 인물, 특히 남성을 멋있게 묘사하는 능력이 워낙 탁월해서 일찍이 팬덤을 형성했다. 아마추어 만화동호회 ‘PAC’ 회장을 역임했고, 그 시절부터 이미 짜했던 명성에 걸맞게 1993년 『윙크』 편집부로부터 직접 의뢰를 받아 <흐르지 않는 시간>을 게재하며 데뷔했다. 이후 단편을 몇 편 하다가 1994년 첫 장편 《네 멋대로 해라》로 1990년대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프랑스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서 제목을 가져왔으나 내용은 아무 상관이 없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 ‘진원’과 ‘호수’는 가정형편이나 자라온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절친한 친구다. 《네 멋대로 해라》는 두 소년이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 함께 꿈을 꾸고 우정을 다진다는 내용으로, 가수나 연예계 같은 향후 학원물의 주요 소재를 한 발 앞서 전유하고 있다.
물론 아마추어 시절의 메인 테마이자 2000년대 나예리가 천착하게 되는 ‘BL(Boy’s Love)’의 기운도 슬며시 감지된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자살로 삶을 냉소하게 된 ‘수민’이와 사고뭉치 ‘다나’ 같은 여성 캐릭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진원이와 호수다. 작품의 에너지는 오롯이 가슴에 상처 하나쯤 간직한 두 남성의 화학작용에서 뿜어 나온다. 하지만 동성 간의 애정관계를 어디까지나 ‘느낌적 느낌’으로 남겨두면서 사랑인지 우정인지 줄타기 하던 모호한 태도는 《Maybe So Sweet》 《Glory Age》 《1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거쳐 《피터 판다》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이후 나예리는 BL로 완전히 전향한다. 2002년 이른바 ‘동인녀’들을 겨냥해 강현준, 심혜진, 이빈 등과 함께 퀴어 앤솔로지 《Youth》를 낸 건 일종의 출사표였다. BL작가로서 나예리는 2005년 그림을 곁들인 소설 《크로스로드》를 펴냈다(연재처는 『이슈』). ‘N-Kun’이라는 필명으로 개인지를 발행해 《드레스코드》 《U don’t know me》를 선보였다. 2007년 ‘다른 사랑’을 주제로 한 앤솔로지 《순애보2》 작업에 참여했다. 2014년 ‘카카오페이지’에 《수라의 문》을 연재했으며, 첫 단편집 《Frail》을 냈다. 2017년 현재 《DRESS CODE》를 비롯한 성인 BL물 창작을 지속하고 있다.
데뷔작| 1993년 <SUMMER TIME>
대표작| 《Hotel AFRICA》 《Stupid》 《FEVER》 《Martin & John》 《케덴독》
서늘하면서도 탐미적인 그림과 감수성 어린 색감으로 명성이 자자한 작가. 그 덕에 만화가들 중 표지 삽화를 제일 많이 그린 작가. 나예리와 더불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한국 만화 최초로 흑인/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이기도 하다. 별가루를 뿌린 듯 화사하고 기다란 눈동자가 트레이드마크인데, 몹시 섬세하고 아름다운 나머지 항간에 ‘눈 하나 그리는 데 한 시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둘 다 아마추어 만화동호회 ‘PAC’ 출신인데다, 비슷한 시기 같은 잡지에서 데뷔한 까닭에 늘 나예리와 비교되거나 묶여 평가되곤 한다.
1970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박희정은 고등학교 과정은 서울에서 마쳤다. 이후 일러스트 회사에 잠시 몸담았다가 곧 그만두고 나와 만화그리기에 전념했다. 아마추어 씬에서 이미 이름이 높았던 실력자답게 1993년 『윙크』 창간호에 <SUMMER TIME>을 실으며 데뷔했고, 이후 《만화가네 강아지》 《I Can’t Stop》 등을 선보이다가 1995년 《Hotel AFRICA》를 연재하게 된다.
미국 유타 주 사막에 ‘AFRICA’라는 허름한 호텔이 있다. 《Hotel AFRICA》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흑인, 정확히는 흑백 혼혈 게이 청년 ‘엘비스’의 회고담으로, 삶과 사랑에 지친 소수자들의 애환을 나른하면서도 쿨한 감성과 내레이션으로 표현했다. 미국, 사막이라는 이국적인 풍광, 1990년대 한국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캐릭터들이 박희정 특유의 세련되면서도 감각적인 그림 및 정서, 색채와 어울리며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발휘했다. 그림에 비해 늘 좀 아쉽다는 평을 들었던 스토리텔링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옴니버스 구성과 잘 어울렸다. 당연히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명실상부 박희정의 출세작이 되었다. 무엇보다 흑인, 미혼모, 게이, 집시 등 전대미문의 마이너 캐릭터들로 이룬 성공이라 더욱 값졌다. 한국만화사의 이정표라 할만한 《Hotel AFRICA》는 곧 미국과 유럽에서 번역 출간되었을 뿐더러, 2000년 MBC 라디오프로그램 <만화열전>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첫 연재를 성공적으로 끝내자마자 박희정은 곧장 《Martin & John》 작업에 들어갔다. 때는 1998년. 성인여성을 대상으로 한 『나인』이 창간되며 중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야 했던 소재와 표현의 수위가 한층 넓어진 상태였다. 이에 박희정은 《Hotel AFRICA》에서 못다한 이야기, 아마추어 시절부터 늘 관심이 많았던 소재, 즉 퀴어로맨스를 『나인』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결심하지만…… 2001년 잡지가 폐간되며 그 뜻을 펴지 못했다.
박희정의 세계가 다시 펼쳐진 것은 그로부터 7년 후. 친정 『윙크』가 재연재를 결정하면서부터였다. 이로써 마틴과 존의 코믹하면서도 달달한 러브스토리는 2010년, 시작한 지 12년 만에 끝이 났고, 박희정은 이 작품으로 그해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워낙 그림이 매혹적인 탓에 만화계 외에 여기저기 불려가는 일도 많았다. 1999년에는 박기형 감독의 영화 <비밀>을 만화화 한 《Secret》을 『윙크』에 실었다. 2001년 1월 컬러 삽화집 《Siesta》를 발매했고(대히트 했다), 12월에는 만화가 최초로 일러스트 개인전을 열어 성황리에 마쳤다. 2006년 작곡가 방시혁, 사진가 황영철, 작가 귀여니와 함께 ‘신드롬’이라는 프로젝트 팀을 짜, 글과 음악과 그림과 사진을 접목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2010년에는 뮤지컬 <쓰릴 미>, 2012년에는 퀴어영화 <라잇 온 미>의 일러스트 포스터를 만들었다.
2012년에는 김조광수 감독의 퀴어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동명의 웹툰으로 옮겼다. 그전까지 종이에 꼬박꼬박 손으로 그림 그리고 색칠하던 아날로그파였지만 더 이상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기왕 발 디딘 거 이듬해 ‘네이트웹툰’에 고양이처럼 섬세한 남자와 강아지처럼 저돌적인 여자의 로맨스《케덴독》을 연재했다. 2015년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 순정만화특집”에 <초능력 소년>을 게재, 여전한 감각을 뽐냈다. 2017년 현재 '다음웹툰'에 《리안소울의 엑소클럽》(신진오 글)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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