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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주 Oct 11. 2017

1990년대 뉴웨이브 ③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천계영

책 권수가 수입과 직결되던 대본소 시절에는 아무래도 대하서사가 많았습니다. 《불새의 늪》 《아르미안의 네 딸들》 《별빛속에》 《북해의 별》 같은 대작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가 창간한 이후 상황은 달라집니다. 일단 초대작 장편 외에 중단편이 실릴 공간이 마련되면서 일상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잡지의 주독자층이 중고등학생으로 특정되면서 학원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주/월간지의 특성 상 옴니버스 형식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발맞춰 신파가 대세였던 이전 세대와 다른 정서와 감각의 신진들이 대거 등장하게 됩니다. 천계영은 그중 가장 폭발적인 파급력을 보여준 작가로 트렌디한 패션과 유머, 무엇보다 외롭고 유치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현실 그대로의 십대를 선보이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데뷔작| 1996년 <탈렌트> 

대표작| 《하이힐을 신은 소녀》 《DVD》 《오디션》 《언플러그드 보이》 《예쁜 남자》 



1990년대 만화계의 슈퍼스타. 마냥 심각하고 진지했던 만화 속 십대들을 외롭고 유치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캐릭터로 위치 조정한 장본인. 스타일리시한 패션 감각과 감각적인 연출, 독특한 유머감각의 소유자. 자칭 “그림 잘 못 그리는 만화가”로서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 시절 이미 컴퓨터 작업을 시도한 얼리어답터. 영혼이 빠져 나간 듯 텅 빈 눈동자의 캐릭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슬플 땐 힙합을 추는 '언플러그드' 소년들 

                           

천계영은 1970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나 부산과 서울을 전전하며 자랐다. 거주지의 변화만큼이나 삶의 변화도 무쌍했다. 소싯적 옷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지라 대학에서 의상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학업성적이 몹시 뛰어났던 탓에 하는 수 없이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는 공부가 아닌 옷 그리기, 책 읽기 같은 ‘딴 짓’으로 시간을 보냈고, 졸업 후에는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게 좋아 보여서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이 환상은 2년 동안 광고일을 하는 동안 산산조각이 났고, 이에 사표를 던지고 나와 만화그리기에 전념했다. 언젠가 본 박희정의 그림에서 받은 충격과, 진짜로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일념이 뒤섞인 결정이었다. 자고 일어나 그림 그리기만 10개월. 천계영은 1996년 『윙크』신인작가공모전에 <탤런트>로 대상을 수상하며 만화계에 데뷔했다. 그리고 곧장 연재에 돌입했으니, 바로 《언플러그드 보이》다.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중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아 동시대 청소년의 패션과 언어, 유머와 연애, 고민과 로망을 그려낸 천계영의 감각은 《오디션》에서 대폭발한다.


고등학생 ‘지율’이. 착하고 예쁘고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는 지율이의 남자친구 ‘현겸’이. 지율이의 짝꿍 ‘고호’와 중증 왕자병 환자 ‘명명’이와 반항아 ‘이락’이. 《언플러그드 보이》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동시대 청소년들의 패션과 언어, 유머와 연애, 고민과 로망을 문자 그대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 감각은 연예계 뒷이야기와 오디션의 속성을 귀신같이 캐치한 후속작 《오디션》에서 대폭발한다. 


현겸이가 풍선껌 광고에 등장하고, 《오디션》 단행본이 100만부 이상 팔리고, 만화에 기반 한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상품이 개발되고, 심지어 당대 최고의 아이돌그룹 ‘HOT’의 뮤직비디오까지 캐릭터 디자인하면서 문화계 내 천계영의 인기와 영향력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즈음 천계영은 전에 없이 우울증에 시달렸고, 결국 그림공부를 핑계 삼아 모든 작업을 중단한 채 뉴욕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설 한 편과(《더 클럽》) 《오디션》 삽화 및 메이킹북을 펴냄으로써 그간의 작업/스타일과 결별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나서 도리어 우울증에 시달렸던 천계영은, 과거의 영광에 매몰되는 대신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하는 것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끝과 시작 


2003년 한국으로 돌아온 천계영은 “변했다” “감각이 예전 같지 않다”는 비판에도 제 맘껏 《DVD》 《하이힐을 신은 소녀》를 그렸다. 2009년에는 인터넷에서 《예쁜 남자》를 연재했는데, 독특한 설정과 인기에 힘입어 몇 년 후 이지은, 장근석 주연의 동명드라마로 제작되었다. 2011년에는 그간의 화풍을 싹 바꾸고 초보자들을 위한 패션 만화 《드레스코드》를 ‘다음웹툰’에 실었고, 2015년 《좋아하면 울리는》을 시작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반경 10미터 안으로 들어오면 알림음을 내는 어플 ‘좋알람’이 보편화 된 세상’에서의 사랑, 연애,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첨단 테크놀로지와 아날로그적 주제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 작품은 여러 모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일단 앱 개발업체 ‘소개요’가 비슷한 기능을 가진 똑같은 이름의 어플을 출시하면서 천계영과 법적 공방을 벌였다. ‘저작권 침해다’ ‘문학적 상상을 기술적으로 구현한 사례일 뿐이다’로 대립하던 양측의 입장은, 결국 ‘소개요’가 앱의 이름을 바꾸고 만화를 마케팅에 활용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세계 최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업체 ‘넷플릭스’는 《좋아하면 울리는》을 드라마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오리지널 드라마로, 2018년 선보일 예정이다. 



1990년대 뉴웨이브 ①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나예리, 박희정


1990년대 뉴웨이브 ②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유시진


1990년대 뉴웨이브 ④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권교정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 만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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