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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주 Jun 16. 2015

[이장욱]물질들

물질은 관념에 의존적이다

                          물질들


                                                                                                 이장욱


돌들이 나와 무관하다

간판과 내가 무관하다

나는 미묘한 침묵에 빠진다

당신이 하나의 물질로서 나의 눈앞에 피어난다면

나는 기도하듯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다

우리들 사이에 오랫동안

젖은 사람들이 피고 질 때에

나는 돌을 쓰다듬듯이

나는 간판을 바라보듯이

의아한 표정의 당신에게

물끄러미

스며들 것이다

사무실 창밖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적힌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다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죽은 친구의 전화번호를 찾아

수화기를 든다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사



돌들이 나와 무관하다. 간판과 내가 무관하다. 나 이외의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무관한 것에 대해 나는 침묵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태도다. 그러나 무관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에 이 자연스러움은 반쪽짜리다. 나의 침묵은 미묘하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오래된 정의이다. 물질은 '감각할 수 있는 것'을 초과한다. (반면 '물체'는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된다.) 물질은 관념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만질 수 없어도 그것은 존재할 수 있다. 만지거나 본다는 것은 경험적이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무엇인가는 늘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지각하는 순간, 물질과 나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성립된다. 이 관계가 이 세계에서 우리라는 존재의 위치를 특정한다. 그러나 시는 '무관함'에서 태어났다. 시는 모순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시를 구원하는 것은 당신의 등장이다. 물질의 세계에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은 절대적이다. 당신은 물질들 사이에서 마치 간판이나 돌처럼 피어오르지만 당신의 등장으로 세계는 바뀐다. 기묘한 침묵으로 웅크리던 나는 '물끄러미' '기도하듯' '스며든다'. 먹물 한 방울이 사발 속의 물의 색깔을 검게 물들이듯, 당신은 나의 세계를 모두 뒤바꾸며 등장한다.


당신은 등장하지만 나에게 오지 않는다. 당신은 등장하지만 나로부터 멀어지지도 않는다. 당신은 나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 등장 이외에 당신이 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 당신과 나 사이에 젖은 사람들이 피고진다는 것은 순수한 나의 감각이다. 나는 당신의 표정을, 당신과 나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들의 시작과 종말을,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무관한 것들의 변화를 안다. 돌들에 대해 내가 무관하였듯 (그래서 내가 미묘한 침묵에 빠졌듯 당신은 의아한 표정에 빠진다) 당신은 나에 대해 무관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스며든다. 이것은 나에게 완벽한 관계다. 완벽은 최상의 좋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는 어찌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세계의 것들에 무관하였던 나는, (그래서 존재의 형식이 부재했던 나는) 당신에게 깃들어감으로써 비로서 '존재한다'는 형식을 얻는다. '존재'에겐 '존재의 형식'이 필요하다. '생명'이 '살다'라는 형식을 갖듯이. 성서의 문구는 존재하되, 그 형식은 나부낀다. '나', '너', '주예수', '믿음', '구원'과 같은 단어들은 깃들어갈 당신을 만나지 못한 채 무관하다. 세계는 원관념이 부재한 보조관념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시의 '무관함'이 놓여 있는 모순이다.


죽은 친구(원관념)는 전화번호(보조관념)로 남았다. 수화기를 드는 것은 무관함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모순을 가로질러 '연결'을 이루려는 의지다. 그러나 그 대상은 죽은 친구다.  시는 결말을 정해놓지 않았으나 몇 가지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1)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2) 전화번호가 사라졌을 것이다.  3) 엉뚱한 사람이 전화를 받을 것이다. 4) 시는 전화를 하지 않고 그저 수화기만을 든 채로 정지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시는 도달하지 못한다. 시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시의 세계 어딘가에 '당신'이 있지 않았다면, 시는 붕괴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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