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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주 Aug 23. 2015

[손택수] 구름의 가계

여성의 몸엔 구름이 떠다닌다

               구름의 가계


                                                                                   손택수



상할머니의 몸속에선 가끔씩 구름 우는 소리가 들렸다
쿠르릉 먹구름 우는 소리가 신음 신음 새어나왔다  

그런 날은 영락없이 비가 내렸다
고가메 너머의 구름이
지붕 위까지 바짝
끌어당겨지곤 하였다

상할머니는 비를 불러왔다 몸이 쿡쿡 쑤시는 아픔으로
들판을 쿡쿡 쑤시며 마디마디 뼈마디 저린 비를 짚고 왔다

상할머니의 몸은 천문을 품고 있었던 게지
내가 알지 못할 예감으로 떨리는 우듬지 끝
떨어져내리는 잎사귀마다
빛나는 통증으로 하늘과 이어져 있었던 게지

쿠르릉 밤늦게 저린 다리를 끌며 일어난 어머니 빨래
를 걷는다
서러운 몸속에서 구름이 유전하고 있다



#손택수,「목련전차」 창비



계(系)는 이 세계, 혹은 자기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개념 중 하나다. 생태계, 체계라는 개념어들에 사용된다. '계'는 '연결'과 '이음'의 의미를 가지는데, 연결은 그 자체로 복수의 사물과 사건, 생명들을 엮어 새로운 의미망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사과와 복숭아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이들을 연결하면 '과일'이라고 하는 의미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 


가계(家系)는 집안의 계통을 의미한다. 통상 가계는 성씨를 중심으로한 혈족 개념의 일부로 이해되며 족보를 통해 '기록'된다. 나와 할아버지의 가계는 족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기록된 가계는 '기록'의 힘이 그러하듯 긴 세월을 버티며 견고하고 정확하게 유지된다. 그러나 가계에 편입되는 새로운 성씨인 여성의 가계는 족보의 외부에 남게 된다. 여성의 가계는 족보에 집합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형태로 각각의 여성에게 남아 흩어져 있다. (어머니의 외활머니는 족보를 통해 찾기는 불가능하지만 어머니의 기억과 신체 속에 남아 있다.) 기록되지 않으나 기억되기에, 명징하지 않으나 신비롭고 신화적인 정확함을 가지고 있다. 


상할머니의 신체는 그 안에 천문을 품고 있다. 이는 자연의 계절적인 순환과 반복에 맞춰 신체와 생활을 구성했던 여성의 고유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문에 맞춰 살아가던 삶은 어느새 그 안에 천문을 품는다. 볕이 좋으면 볕이 좋아서 해야 할 일이 있고, 비가 올 것 같으면 비가 올 것 같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여름이 가면 여름이 가기 전에 마쳐야 할 일이 있고, 겨울이 끝나면 봄을 맞이하기 위해 해야할 일들이 있다. 몸은 이러한 변화들과 그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을 기억한다. 특히 농경문화에서 여성의 생활은 자연과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시는 이 관계의 유전을 어머니의 가계로 정의했다. 천문에 맞춰 천문을 신체의 일부로 품은 여성들의 가계는 보편적이면서도 내밀하다. 

 

시의 언어는 탁월하다. 여성 가계의 보편과 내밀함을 육체적인 촉감과 자연 현상의 일부로 응결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했다. 이러한 현상들이 원래 그러하듯 시의 언어도 일상 속에 있다.  몸이 쿡쿡 쑤시는 아픔으로 들판을 쿡쿡 쑤시고, 마디마디 뼈마디 저린 비를 짚고 상할머니는 온다. 김을 매는 순간 몸이 쿡쿡 아파오는 상할머니의 고통은 할머니의 호미에 잡초를 뿌리째 내어놓는 들판의 아픔과 '같다'. '같다'는 것은 들판의 변화와 할머니의 신체 변화가 같은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 안에 있으며 이 인과율 자체가 천문의 일부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천문은 구름의 이미지를 통해 여성의 신체들로 유전된다. 구름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서러우며, 근원이 불분명한 소리와 바람을 동반한다.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어디에선가 다시 나타난다.


(어찌보자면구름의 가계라는 표현은 정확하다. 여성의 가계는 현대의 클라우드cloud의 개념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이 이를 염두에 두고 '구름의 가계'라는 표현을 구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름'의 형성과 작동은 새로운 형태의 '집합', 계의 형성에 대한 영감을 준다.)


손택수의 시는 미묘한 생태적 감수성을 가졌다. 생태적 감수성이란 물론 정의가 필요한 개념이다. 손택수 시의 생태적 감수성은 '소멸'에 대한 나름의 해석에 집중되어 있다. 순환되고 반복되는 세계에서의 소멸은 사라짐이라기 보다는 극적인 변화, 혹은 다음 대상으로의 극적 이전(移轉)에 가깝다. '극적'이라는 것은 변화 혹은 이전의 순간이 시간의 길이와는 무관하게 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상할머니와 어머니의 유전은 이러한 이전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손택수의 시는 이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떨어져 내리는 잎사귀들이 겪는 빛나는 통증은 손택수의 시를 통해 우리 경험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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