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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주 Aug 23. 2015

[이창동]밀양

지상의 고통과 인간의 길

영화는 구름 몇 점이 한가로이 떠 있는 푸른 하늘로부터 시작합니다. 밀양 외곽의 낯선 도로에서 멈추어버린 차, 그곳이 어디인지 그곳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는 막막한 곳에서 신애와 신애의 아들 준은 집을 잃은 사람들처럼 자동차 정비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소의 부재와 이끌어주는 자’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일관된 고민거리입니다.) 



영화는 아들 준이 실종되는 순간부터 신애가 준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이 사건과 관련된 카메라의 피사체로 준이 아닌 신애를 선택합니다. 즉 우리는 준이 유괴되는 순간도 볼 수 없고, 준을 납치한 범인의 전화 목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없고, 준이 어떤 모습으로 죽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신애를 통해 보고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순수하게 신애의 고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의 속성이 본래 그러한 것처럼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신애의 고통을 나눌 수 없습니다. 위로는 할 수 있을지은정 그 고통을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고통을 가진 자에겐 갈증으로 남습니다. 고통을 모르는 자로부터 받는 위로와 위안은 갈증을 부추길 뿐입니다.



결국 신애는 무한자인 신과 교감하며 자신의 고통을 나누고 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어느 순간 신은 신애의 모든 고통 -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 끝내 이루지 못했던 피아니스트로서의 꿈, 그리고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들의 죽음 - 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신의 무한함,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신의 무한함 앞에서 신애는 비로소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의 무한함이 오히려 신애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토록 믿었던 신이지만, 살인범은 신에게서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신애는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신에게서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방황을 시작합니다. 도둑질을 하고, 예배당의 예배를 방해하고, 독실한 신자인 장로를 꼬셔내 불륜을 유도하고 자신을 위해 기도중인 사람들의 집에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신은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타락과 공격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신에게 절망과 분노를 느끼는 신애는,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신애는 이름 그대로 신을 사랑함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신의 섭리란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이고, 다만 신을 믿을지 말아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우리는 종교의 교리를 통해 신의 섭리에 대한 메타포를 짐작하며 삶의 윤리와 기준을 세웁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베풀 것인지, 무엇을 빼앗아 갈 것인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신애의 고통은 신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을 위해 은혜를 베풀었다고 믿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됩니다. 즉 신을 자신의 해석 속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따라서 신의 길로 들어서려 한 순간 신애의 고통은 폭발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신애는 인간입니다. 불충분하고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실수와 절망을 반복하고 삐그덕 거리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실 고통이란 것은 인간으로서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저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쥐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애는 신의 이름을 빌어 죄인을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용서하는 것, 십자가를 내려주는 것은, 비록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한 구절이 있다지만, 신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죄인의 죄를 용서한다고 해서 그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법적으로 전과자이고 사적으로는 원수이며 신을 향해서는 죄인입니다. 법적으로는 벌을 받으면 되고, 사적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면 되지만, 죄를 용서하는 것은 무한자로서의 신의 역할입니다. 신애는 신을 흉내내려 합니다. 마치 신처럼 죄인을 용서하려 하고, 마치 신처럼 스스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척 합니다. 

            

이 세상은 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그러나 결국 신과 싸우는 신애의 모습은 고통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신은 마치 푸른 하늘에 구름 몇 점이 떠있는 풍경처럼 텅 비어 있습니다. 신을 향해 욕을 한들 그것이 하늘까지 닿을지 알 수 없고, 신을 향해 주먹질을 해도 닿질 않습니다. 무한하며 텅 비어 있는 신은 도달할 수 없는 장소에 있는 도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애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신체에 고통을 새기는 것입니다. 신을 바라보며 상처를 만드는 이 행위는 무척 상징적입니다. 신애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아들을 신에게 자발적으로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것에 상처를 내 신에게 대항합니다. 이 과정은 신애가 탯줄을 자르고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기 위해 만들어내는 상처에 가깝습니다. 신과 닿기를 원했던 신애는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는 유일한 고통을 통해 스스로 다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옵니다. 고통이 충만한 곳, 서로의 고통이 다른 고통을 바라보며 측은해하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공감하려 하는 곳, 신애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신의 공평함을 각자의 행복에서가 아니라 저마다 쥐어진 십자가로부터 찾을 수 있는 장소에서, 신애는 스스로 자기 머리를 자릅니다.



종찬은 신애가 스스로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거울을 들어줍니다. 아주 세속스럽게 사는 종찬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내내 편안함과 웃음을 줍니다. 언제나 타인을 도와주려하고 참견하려 하는 오지랖 넓은 종찬과 이제 홀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듯한 신애가 함께 있는 모습은, 인간 세상에서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선택의 폭을 보여줍니다. 타인의 고통을 거울삼아 자신의 고통을 응시하며, 인간은 조금 더 삶의 진경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푸른 하늘을 보여주며 시작했던 영화는 몇 가지 쓰레기와 잡초, 먼지로 덮인 땅을 보여주며 끝납니다. 



#이창동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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