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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주 Jan 09. 2016

[이장욱]계단의 힘

구조가 되어가며 구조를 이야기하기

계단의 힘


                                                          이장욱


계단은 단 하나의 의혹도 가지지 않았으며

계단은 미래에서 온 음악과 같아.

당신이라면 탭 댄스도 가능하겠지만

계단은 정교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지배하지.

마치 남을 의식하지 않는 힘으로 살아가듯이

마치 정확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생각인 듯이

계단은 완전한 계단들로 이어져

홀연히 사라지지 않네.

지금 계단을 내려오는 당신은 계단으로 가득하며

당신도 모르게 계단이며

그로써 당신은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높이를 얻은 것이지만

한번쯤 튀어 올랐다가

다른 세계로 사라진 빛방울처럼

당신은 홀연히 계단 속으로 스며들었네.

오늘도 우리는 차근차근

계단의 역사를 논의하지만,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사, #이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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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를 때 신체는 계단이 된다. 계단이 허락하는 보폭과 높이에 맞춰 인지와 근육이 작용한다. 계단을 오르겠다는 의지는 계단을 초월하는 기획을 내놓지 못한 채 계단에 의해 디자인된다. 한꺼번에 두 계단을 뛰든, 동시에 여러 계단을 뛰어 내리든, 계단은 그 무엇도 하지 않지만 우리의 기획은 계단에 의해 제한된다. 계단에 쭈그려 앉는 순간의 무릎의 각도와 시선의 높이는 모두 계단에 달려있다. 이것이 계단의 힘이다.


계단의 자리에 어떤 사물의 이름을 두든, 혹은 언어를 두든 이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체의 구조가 이룬 짜임새 안에서 생명이라는 에너지를 연소한다. 구조는 운명보다 물리적이며 결단보다 절대적이다.


그러나 계단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영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계단 안에 새로운 구조물이 인입될 때, 혹은 계단이라는 구조체로부터 이탈할 때 계단의 힘은 미치지 못한다. 구조체를 대신하는 새로운 구조체로의 이행은 선택할 수 있는 범주에 있다. 물론 이 이행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계단에 있는 사람이 새로운 구조체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의지적인 낙관에 불과하다. 계단이란 그 자체로 단 하나의 의혹조차 없는, 일종의 '전제'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계단에 스며들고 마침내 계단이 되어버리는 것은 원래 그렇게 예견된 미래처럼 현재를 방향짓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계단을 오르내리며 계단을 익히고, 계단에 맞추어지고, 계단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단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하루 계단의 신념, 계단이 디자인한대로 성공적으로 계단을 오를 수 있는 방식을 스스로에게 되뇌일 뿐이다. 계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 모두를 이 주술 속에 가둔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계단의 역사를 얘기한다는 것은, 계단을 대상화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방식이다. 전제된 미래로서의 구조가 아닌, 계획되고 촉발되었던 기원으로서의 계단을 사유하는 순간, 우리는 계단이 놓여있는 더 큰 구조체를 이해하게 된다. 계단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계단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계단의 최초의 형태는 무엇인지 이해하는 순간, 완결된 구조체로 받아들여졌던 계단이 이해가능한 대상으로 변화한다. 계단은 구조일 뿐 세계 자체는 아니라는 인식의 도래, 짜임새의 매듭과 결을 이해해 그것을 한올 한올 풀어낼 수 있는 세계관을 인입함으로써 계단의 신화는 찢어진다.


그러나 이를 가능케 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사변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힘'이 출현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우리의 생은 계단으로 수렴되는 좀비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곤란이며 우리 시대의 표정이다. 그리고 이장욱의 시가 멈춘 곳이다.


"오늘도 우리는 차근차근 계단의 역사를 이야기하지만," 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단의 역사가 아니라 '이야기'다.  계단의 각 층에 있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계단의 역사를 묻고 답하고 이야기하며, 그것이 끝없는 계단의 제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연결되는 것.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이야기의 연결만이 유일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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