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각주 Jan 20. 2016

[이장욱]이탈

시간들의 흐릿한 환상


이탈



조그만 나사는 천천히 회전한다.

한 바퀴를 돌아가는 아주 오랜 동안

구멍 깊은 곳으로 그가 빠져나간 만큼 바람 든다.

안 보이는 그곳을 메우기 위해

사기 그릇이 놓인 선반은 느리게 기울어진다.

너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나는

시속 일백 킬로로 질주하는 택시 안에 있었다.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추락에 대해 상상하는 별들은 없었다.

별 하나가 보이지 않게 궤도를 바꾸는 순간

실내의 난은 무거워진 몸을 낮춘다.

소파에 누운 네 몸의 빈곳으로

잠은 별빛처럼 스며든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약간의 이동일 뿐이니까.

그것은 술을 마시며 네가 한 말이었다.

붉고 긴 선들이 사 차선 거리 저편으로 사라진다.

내가 밤하늘의 시선으로 나의 질주를 바라보자

사기그릇이 놓인 선반은 

어떤 추락에 대해 상상한다.

조그만 나사는 천천히 회전한다.

구멍 깊은 곳으로 천천히 바람은 든다.

밤거리의 저편으로 나는

조금씩 기울어진다.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


시간은 상대적이다. 시간은 무언가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허름한 난간에 슬어든 녹의 시간은 무상하다. 같은 시각 무언가를 뜨겁게 관통하는 총알의 시간은 격렬하다. 개개의 사물과 사건에 명명되는 다른 시간은 이것들이 연결된 이 세계가 무한정하면서도 개별적임을 암시한다.


작은 나사가 느리게 돌고 나사가 돈 만큼 빈 공간이 생기고 이 공간에 바람이 들어차 결국 나사가 돌아간 만큼 선반은 기울어진다. 일상에 익숙한 시선으로는 포착되지 않으나 이것은 개별의 사물들이 고유하게 겪고 있는 급박한 사건들이다. 우리에겐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감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것들은 각각의 고유성들의 연결로만 이해된다. 선반 위의 사기그릇과 소파 위의 너와 실내의 난이 그러하듯이. 이들이 연결된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는 별도로 존재한다. 나는 그 세계의 어디쯤에 또 하나의 고유성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은 빈 공간들이 연결된 해면체다. 해면체는 구멍들의 입체적인 연결이다. 우리는 시간의 빈공간들을 이동하며 시간의 불균질함에 숨어든다. 소파에 누운 몸의 빈 곳으로 별빛이 스며들듯이. 만약 시간이 절대적이라면, 휘거나 수축되거나 회복되지 않는다면 급기야 시간이 빈 공간이 모두 메워져 그 자체로 단단한 경도의 총체라면, 시간은 삶에 깃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시간에 의해 관통당한다. 세상은 각각의 시간들과 각각의 고유성들이 이룬 확률이며 나는 확률을 횡단하는 여행자다. 나의 좌표는 너와의 기억을 통해 마련된다. 나는 너와의 기억에 깃든 시간이 내는 고유의 진동 안에서 기울어진다. 나의 좌표가 내 안에 부재한다는 것은 초월과 절망의 경계선 사이에 여전한 삼투가 실재한다는 것, 다만 그것을 암시한다. 미래가 과거에 대해 그러하듯.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모종의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 이 시간, 세계의 모든 것들이 모든 것들을 향해 작동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이장욱]계단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