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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주 Feb 29. 2016

[장석주]사이

'이다'의 격렬

사이  



강 중심을 향해 돌을 던진다.
장마가 끝나고
단풍 된서리 눈보라가 차례로 지나갔다.
다시 백로와 상강 사이
그 돌은 
하강 중이다.

방금 자리 뜬 새와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
생과 멸
사이

밥과 술에 기대 사는 자가
담벽에 오줌을 눈다.
작약과 비비추, 호미자루와 죽은 쥐,
구접스러운 것들 다 황홀하다.
구융젖 빨고 구핏한 길 돌아
예까지 왔으니,
더러는 이문이 남지 않았던가.

돌은 제 운명의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
사이
그 고요의 깊이를 측량하며
하강 중이다.


#장석주  「절벽」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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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것은 '무언가의 사이에 있다'의 줄임말이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하늘과 땅 사이, 지구와 우주 사이,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우리는 있다. 이 있다는 존재의 한 측면인 '상태'를 나타낸다.


존재한다는 것은 '있다'를 '이다'로 바꾸는 운동이다. '나는 학교에 있다'와 '나는 학생이다'의 차이. 다시 말하면 상태로서의 '있음'을 벗어나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신일 수도 있다. 혹은 인간 자신이 부여할 수도 있다. 인간의 공동체가 의미를 부여해주기도 한다. 다층에 의해 존재는 규정되고, 이러한 규정은 고요하지만 격렬하다. 


이렇게 의미들로 연결된 그물망이 곧 존재의 진리적 의미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연결망은 출렁인다. 예를 들어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진실 앞에 마주했을 때, 이 연결망은 출렁임으로서 존재를 구원한다. 때로 인간은 진실 앞에서 오히려 무기력을 느끼고 진실을 회피해야만 할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의미들의 연결망은 진실만이 아니라 진실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충분히 동참해야 하는 망이다. 그것은 망  위에 놓인 인간이 고통과 거짓 앞에서 흔들릴 때 추락하지 않도록 충분한 여유를 두고 출렁이며 충격을 흡수한다.


이는 불멸하지 못하는 인간이 불안을 이기는 전략이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행복한가, 나는 사랑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굳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그 답을 찾으며 그 속에서 생성되는 의미로 스스로를 '이해'한다. 앞서 말처럼 여기에서의 이해의 실체는 이해가 아닌 경우가 많다. 비록 '이해'가 불가해한 것에 대해 오해하고, 무위한 것에 작위를 더하더라도 그것은 '의미'라는 체계 안에서 용인된다.  


돌은 인간이 아니다. 돌은 하강 중이다. 돌은 그 상태가 존재다. 돌은 자기 운명의 고요 사이를 하강중이다. 계절이 바뀌고 새가 날고 꽃이 피고 질 동안 돌은 하강 중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돌의 존재다. 돌은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절대적이다. 이 하강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려는 순간 이 절대성은 파괴된다. 번잡한 사건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을 뿐 돌의 하강과는 본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것, 혹은 '우주'는 이러한 돌의 존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삶엔 이런 절대성이 없다. 덕분에 불안하지만 다행인 일이다. 


사람의 존재란 '무언가의 사이에서 무언가를 진행중이다.' 이 무언가들을 설명하고 부여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거치며 삶은 운동해왔던 것 같다. 비록 그 운동의 종착점에 이르러 삶에 대해 어떤 결론에 이르든, 때로는 관대와 옹졸 사이, 때로는 절망과 혼돈 사이를 지나쳐 온 삶에 고유의 결이 새겨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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