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 윈터 이스 커밍, 그리고 홈 스윗 홈
거의 10년 살았던 건물을 곧 철거한다는 소식에 장기가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철거민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왜 하필 이럴 때 집 없는 서러움까지 느껴야 하는가. 올해 나는 정말 굿이라도 해야 할까. 영적인 존재가 작두 위에서 칼춤이라도 춰줬으면 좋겠다. 아 근데 그것도 다 돈이 든다. 생각의 형태소 단위 하나하나가 다 원으로 느껴져.
집주인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정신없는 사람 중 한 명이라서 이 사실을 아주 당연히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 빨리 나가라고 할까 봐 한 달 속앓이를 하다 끝내 전화를 걸었다. 뭐 결국 집주인님 해맑은 목소리에서 부정해오던 내 처지를 뼈저리게 느껴버렸네. 계약서 쓸 때 아무리 늦어도 철거 3개월 전에 관련 내용 고지하기로 했잖아요… 우리 그 항목 넣었잖아요… 주인님은 당연히 잊어버리셨겠지만… 그래도 이런 날이 언젠가 올 줄 알았으니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체념할 힘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화조차 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생각해보니 이 집 건물은 아주 낡았지만 아침에 디즈니 공주 흉내도 낼 수 있을 만큼 햇살이 아주 좋고 위치도 좋고 나름 남산타워 뷰… 아무튼 이상하리만큼 조건이 좋다. 그래서인지 이 집은 운이 지지리도 없는 내 삶에 그나마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다. 물론 한 층 아래 살던 작년까지는 맞은편 부자 집 골든 리트리버보다 작은 집에 살았었다. (그 옆집에는 구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살았었고, 우리 동네에는 구 서울시장 공관이 있다. 어쩌면 이 동네 내가 살 수 있는 최고 부촌이라서 사랑했나 봐!) 암튼 뭐 그렇다고 내 인생이 박복한 건 아닌데, 근데 지금 이러는 건 진짜 아니다. 홈 스윗 홈까지 잃어서는 안 되는 시기였다고!
윈터 이스 커밍... 정말이지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올해 나는 회사’들’을 몇 차례 그만두었고 부레옥잠만도 못하게 부유하고 있다. 그렇게 후회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는데, 정신건강이 집보다 중요하지는 않지 않을까 그 인간 버텨볼 걸로 시작해서 내가 어쩌다가 서울로 대학을 왔나까지 질주하고 말았다. 아 맞다, 몇 달 전엔 곤두박질치는 자존감 때문에 뭔가 얻어보려고 가입한 값비싼 커뮤니티의 마지막 날 우연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며 내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걱정 어린 영업을 십분 넘게 들었다. 공들여 얻은 환상이 깨져버렸다. 아 근데 그러네, 나는 언제나 애매모호했지. 아직도 내가 쌓은 것은 경력이 아니라 사회생활이라는 모 님의 끔찍한 충고를 아직도 잊지 못해 곱씹으면서도 아 어디든 계속 다녔으면 전세 대출이 됐을 텐데 생각했다. 나는 왜 세상에 뻐큐를 날리며 쿨하게 잊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가. 갯벌 같은 인간인가 나는 왜!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이게 다 전세 대출 때문이래. 근데 서울 아파트에는 도대체 누가 사는 거야? 도시에 온갖 집이 그득한데 내 집은 왜 없는 거야? 왜 하필 이럴 때 백수인 것일까 나는! 집을 얻는 방법은 위장결혼뿐인가 싶어! 으, 끔찍하다! 소일거리 몇 개로 어디 가서 프리랜서라고 말하기가 영 어색하다. 내가 관종이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그럼 진작 팔이 피플도 하고 유튜브도 했겠지! 뭐래! 닥쳐 ㅇㅈㅁ!
직방을 켰는데 인간들 집 사진이 너무 엉망진창이다. 도대체 다들 왜 이렇게 너저분하고 지저분하게 사는 거야. 집 구조는 또 다 왜 이 모양이야. 너무 못생기고 더럽고 다 싫다. 집 내놓으려고 사진 찍을 땐 이불이라도 개야 하지 않나? 아 너무 싫다. 아 작년이랑 비교하니까 이 동네 너무하네 이따위 집을 내놓고. 왜 이렇게까지 욕심이 많아 건물주들은. 진짜 더럽게 비싸네.
계급 격차를 자주 느낀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부터 쭉 그래 왔다. 그렇다고 내가 또 빈민은 아닌데… 자동 반성했다. 엘리트주의에 대해 그만 생각해야지 싶다. 내 정치적 스탠스를 생각할 때 가끔 내가 너무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격이 있나 질문한다. 굽어보려는 짓을 그만둬야 한다. 으으 재수 없어 내가 뭐라고! 나한테 날리는 뻐큐 뻐큐는 왜 이렇게 자연스러울까. 자기혐오를 그만 해야 해! 뻔뻔한 인간들은 다 잘 먹고 잘 살잖아! 어쩌라고!
요즘 재밌는 것은 정말로 수영뿐이다. 스타트 뺑뺑이를 잔뜩 돌면서 결심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천장에 굴비라도 매달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필 또 병까지 들어서 아무거나 주워 먹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남은 삶 잘 이겨내 보리라. 일단 장을 봐야지, 정든 동네 사진을 꼼꼼하게 남겨둬야지.
아, 그런데 이 모든 결심은 현관문을 열고 형광등을 켜자마자 부서졌다. 스르륵 샤샤샥 벌어진 몰딩 틈 사이로 들어가는 바퀴벌레를 목격하고 만 것이다. 당장이라도 세스코를 부르고 싶었지만! 대략적인 가전제품 구입 비용과 이사비용, 부동산 복비가 당장 스쳐갔다. 내 삶은 언제까지 임시적일까. 신이시여 왜 저를 괴롭히시나요.
아—아— 올해 내 인생 너무 고난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