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2월 - 새해의 일
누군가 제게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을 때, 저는 사실 쉽게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저는 좋아하는 것이 너무 많고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 만큼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대체로 웃기고 허무맹랑한 것에 쉽게 빠져들지만 어렵고 깊고 어두운 것에도 매료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의 취향은 특정 브랜드나 사람을 좋아하는 일로 설명할 수 없고, 느낌적인 느낌을 내는 형용사들로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아무튼 저는 제가 사는 이 세상을 최대한 많이 넓고 깊고 다양하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온갖 것에 기웃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제 취향을 설명할 단어를 우연히 발견했는데요. 바로 '잡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세상의 온갖 잡지들처럼 깊게 파고드는 것이 좋고,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이 재밌고, 지금 유행하는 것들도 좋아하고, 특정한 주제로 무언가를 수집하고 나열하는 일과 이것저것을 오려 붙이는 일을 좋아하고, 싫은 것이 왜 싫은지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잡지를 만드는 사람, 잡지에 글을 쓰는 사람, 걸어다니는 잡지 같은 사람이라면 조건 없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메시아> 시즌1을 몰아 봤어요. 드라마 한 시리즈를 통째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정말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메시아>만 해도 기독교와 이슬람교, 성경과 코란 같은 성서, 적그리스도와 메시아와 미국과 중동, 텍사스의 사회 정치학적 배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같은 지정학적, 역사적 배경뿐 아니라 SNS 시대의 뉴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믿음 등등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 알면 알수록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것이 가득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넷플릭스 콘텐츠와 영화를 보는 일에는 사실 무척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감상한 이후에 새로이 습득한 정보들로 인해 달리 보이는 일들도 참 많지요. 생각해보니 저는 모든 대부분의 콘텐츠 소비를―특히 영상 콘텐츠 소비를― 수없이 많이 연결되어 있는 '하이퍼링크'를 누르는 형태로 지속해온 것 같아요. 사실 보기 전에, 보면서, 보고 나서 알고 싶은 것을,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된 것을 검색하는 일이 제게는 콘텐츠 소비의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입니다.
넷플연가 시즌2를 준비하며 가장 많이 생각했던 지점도 이런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모임을 하이퍼링크를 누르면 열리는 새로운 세계처럼 만들자.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1. 영상 콘텐츠에 관해 더 깊고 재미있게 배우는 일
2. 1번을 오프라인 모임 경험으로 확장하는 일
3. 2번을 지속해 커뮤니티를 가꾸는 일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기본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더불어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구독자 혹은 멤버를 '팬'으로 만드는 일 같아요. 팬을 만드는 콘텐츠 기획은 정말 막연하고 어렵다는 것을 매번 실감하고 있어요. '고객 중심'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디테일에 신경 써야 하고, 이에 앞서 타깃의 니즈도 명확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밀레니얼이 가장 궁금해하는 일과 사이드 프로젝트, 라이프스타일, 휴식, 사랑과 연애, 자아와 감정, 의식주, 취향 등등을 키워드로 삼아 8개의 카테고리를 마련했어요.
그다음, 기본으로 돌아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해보니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섭외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창작한 무엇인가로 생겨난 팬덤이 있는 사람, '콘텐츠 보기'와 '콘텐츠 제작'이 직업이자 일인 사람, 즐거운 수다가 가능한 사람을 찾자!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 내가 만났을 때 즐거웠던 사람이라면 더 좋다!
저는 제가 기획에 참여하는 넷플연가가 언제나 새롭고 기발하고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한 잡지 같은 오프라인 커뮤니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넷플연가의 모임장도 잡지를 만든 사람, 잡지에 글을 쓰는 사람, 걸어 다니는 잡지 같은 사람을 기준으로 섭외하게 되었습니다.
기획자는 사용자이자 생산자이자 커뮤니케이터이고, 카피라이터이고, 때로는 디자이너와 마케터가 되기도 합니다. 촘촘한 후기나 숫자 지표를 따라 제품을 개선하는 일도 필요하고, 기록을 남기는 일도 필요해요.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기획자의 일은 언제나 경험하고, 경험을 만들고 배우는 일이 되겠네요.
넷플연가 시즌2 모임에는 경험하고, 경험을 만들고 배우는 일을 하는 기획자들이 실제로 일상의 경험을 통해 보고 배운 것이 녹아있습니다. 새롭고 재미난 것을 찾아다니는 넷플연가 시즌2 기획자가 미리 만나보고,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부터 재미를 깨우쳐주신 고마운 분들을 모임장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동경하던 영화 잡지의 저널리스트, 평소 관심있게 보던 날카로운 시선으로 글을 쓰는 칼럼니스트, 인생의 진리를 깨우쳐 준 최고의 보드게임 '마작' 강습과 파티를 기획하는 문화기획자, 위로를 주는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 추억이 깃들어있는 잡지의 편집장, 보고 듣고 체험할 것들을 잔뜩 소개해주던 평론가, 자주 사용하는 앱의 콘텐츠를 만드는 기획자 등등 넷플연가 1호 멤버이기도한 제가 좋아하는 분들을 잔뜩 모셔 이분들이 오며가며 겪은 온갖 즐거운 것을 잔뜩 모아뒀어요. 넷플연가 모임이 콘텐츠 전문가의 '넷플릭스 보관함' 같은 아카이브 기능까지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돌이켜보니 모임장님들과 미팅하며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잔뜩 이야기하니 미팅이 끝없는 수다가 되기도 했네요. 웃기도 많이 웃었고, 고민하는 문제에 답을 얻기도 했고, 친구나 가족에게 할 수 없었던 깊은 이야기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미팅은 시즌2 모임의 축소판이기도 해서, (여태껏 사람을 싫어해 왔던(?) 저인데!) 어쩌다 보니 모임을 만드는 일에 진심으로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진정성 섞인 마음까지 생기기도 했어요. 앞으로 여러 모임에 참여하실 여러분께도 깨알 같은 재미를 보증(?)합니다.
요즘, 콘텐츠를 소비하는 일이 무조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무언가를 보고 읽고 듣고 쓰고 말하면서 수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니 어떻게 요즘에도 이런 걸 만들어 내놓을 생각을 했지?
이 장면 정말 불편하다…
내가 이걸 계속 좋아해도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응원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고,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나만 이걸 이렇게 싫어했나?', 혹은 '나만 이걸 좋아하나?' 답답하다 싶을 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 즐거움이 배가 되더라고요. 느슨하고 때로 친밀한 커뮤니티의 매력을 알았달까요.
이제는 넷플연가를 어렵고 불편한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열린 곳, 콘텐츠를 즐기는 방식과 깊이가 남다른 곳, 체념만 남은 좌절에 그치지 않고 목소리를 내어 좋은 콘텐츠를 발견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시즌2에 모임장으로 참여하는 김윤하 음악평론가의 책 『한국대중음악 라이너노트』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요.
누군가 나에게 이런 글들을 대체 왜 썼냐고, 앞으로도 쓸 거냐고 묻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다. 음악을 좋아해서, 너무 좋아해서 그랬습니다.
저는 넷플연가가 일상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은 넷플릭스와 영화 보기를 새롭게 제안하는 커뮤니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에 OTT 서비스가 스며들어 매일 본 콘텐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스트리밍의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 싫은 것, 더 알고 싶은 것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며 서로를 자극하고 성장을 응원하는 커뮤니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좋아해서 지속할 수 있는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든 것에 한 발짝 내딛기 위해 단단한 개인이 되는 법, 열심히 찾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