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 방문기
외출을 위해 옷장 앞에서 서성인 지 벌써 이십 분째, 평소 나답지 않은 망설임이다. 옷을 좋아하지만 취향이 확고한 나는 방문하는 장소와 만나는 사람에 따라 평소 입는 스타일이 정해져 있다. 공적인 일을 하러 나갈 때는 정갈한 셔츠와 일자바지, 또는 정장을 차려입는다. 사적인 만남을 위해서는 옷을 입은 나도, 마주한 상대방도 편안함을 느끼도록 상의는 니트나 점퍼를 입고 하의도 통 넓은 바지를 자주 택한다. 그런데 오늘은 남다른 장소에, 특별한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옷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이 만남은 어젯밤 한통의 전화에서 비롯되었다. 밤늦게 울리는 벨소리,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보고도 통화 버튼에 손가락이 닿았다. 다른 날이라면 그냥 받지 않거나 무심히 넘길 전화였다. 이런 것을 예감이라고 해야 할까.
전화의 주인공은 대학 시절 학교 방송국에서 함께 지내던 후배였다. 얼굴을 못 본 지 이십여 년이 되어가지만 “여보세요, 누나!” 한 마디만 듣고도 누군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밤 열 시가 늦은 시각에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했다는 후배의 용건은 이랬다. 내 동기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마침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으니 시간이 되면 방문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동기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데다가 대학 선후배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며 부고를 전하지 않아 장례식장이 한산하다고 했다. 후배의 마음도 대견하고, 동기의 안부도 궁금한 나는 단번에 알았노라고, 내가 가서 일당백으로 자리를 채우고 오겠노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오전, 그날 처리할 일들을 급하게 매듭짓고 오후 2시를 넘겨 장례식장에 갈 채비를 시작했다. 장례식장 복장이야 검은색에 얌전한 차림으로 정해져 있는데, 게다가 내 옷장의 절반 이상이 무채색의 단정한 옷들인데 나는 왜 선뜻 옷을 고르지 못하는 걸까.
장례식장에 가는 마음가짐이라고 하기엔 미안할 만큼 지난밤부터 가슴속에서 작은 설렘까지 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대학 때 지인과의 만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같은 검은색의 옷이라도 이십여 년 만에 혹시 마주칠지 모르는 선후배, 동기들에게 ‘나 잘 살고 있어!’를 한눈에 보여줄 의상을 고르고 싶었다.
고민 끝에 나의 결정은 이랬다. 아직 쌀쌀한 날씨이니 따뜻해 보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소재를 선택하자. 상의는 캐시미어 니트에 얼마 전 구입해 새 옷의 윤기가 남아 있는 패딩 코트를, 하의는 핏이 딱 떨어지는 울 팬츠를 골랐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장례식장에 가는 예의도 갖추면서 적당히 품격을 갖춘 차림이었다.
신중히 고른 옷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평일 오후라는 시간대 때문인지, 동기가 정말 사람들을 부르지 않아서인지 식장 내부는 예상보다 한산했다. 국화꽃을 놓을까, 절을 할까 망설이며 들어가는데 나를 향해 걸어오는 동기의 모습이 보였다. ‘마스크를 꼈는데도 용케 알아보네.’라고 생각하며 곧바로 걸어가 고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상주들과 맞절을 했다.
그런데 인사를 마친 후, 동기 녀석이 나를 한참을 보고 서있더니 “누구신지?”라고 묻는 게 아닌가. 날 알아본 게 아니었다. 낯이 익은데 누군지 몰라 직장 동료인가 하며 갸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멋쩍게 웃으며 “나야, 주미!”라고 말하자, 오히려 옆에 있던 동기의 형이 큰 소리로 맞아주었다.
“아, 주미 씨구나! 너는 어떻게 주미 씨도 못 알아보냐? 엄마도, 너도 평소에 주미 씨 얘기 많이 했잖아.”
깜짝 놀란 동기는 그제야 나에게 다가오며 반가움을 표했다.
“주미구나, 진짜 미안해. 마스크 쓰고 있어서 몰라봤어. 정말 너구나!”
그렇게 어색한 소동 이후, 준비된 테이블에 동기와 마주 앉았다. 하지만 어색함과 민망함은 첫인사뿐이었다. 중년이 된 우리는 청년 때에 비해 몸은 불어나고 머리숱은 줄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20여 년 전 그 어느 날처럼 편안한 기류가 우리를 감쌌다. 사회에서 만나 서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연봉은 얼마인지, 타는 차는 무엇이고, 사는 곳은 어디인지 기싸움을 하며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는 무시무시한 어른들의 세계를 벗어나게 하는 기류였다. 그저 서로의 안부와 취향, 열정에 관심을 갖던 순수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장례식장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마흔 중반이라는 나이는, 결혼식이나 돌잔치 같은 경사스러운 일에 초대되기보다는 어린 시절, 놀러 가면 기꺼이 밥상을 차려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친구의 부모들을 떠나보내는 자리에 부름을 받는 일이 많아지는 때가 아닌가.
장례식장에서 만나면 잠시 어색함에 정적이 흐르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이내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와의 일화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 들며 “그땐 그랬지!”를 연발한다. 지금 우리의 나이보다 더 젊었던 부모들의 호기로움과 똘똘 뭉쳐있어 두 배로 한심했고, 두 배로 더 사고를 쳤던 과거의 너와 나를 떠올리곤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러다 웃음소리가 장례식장 담장을 넘어갈라치면 검지를 입술로 가져가며 어깨를 움츠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다.
이제는 더 이상 오랜 친구나 지인을 만나는 장례식장을 갈 때 옷장 앞을 서성이지 않는다. 나의 성취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그저 내 본연의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 편안한 자리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라는 시간이 가진 부담감, 슬픔으로 채워진 공간이 품은 무거움 대신 소중했지만 소홀했던 인연들을 다시 만난다는 반가움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 장례식은 국화꽃과 함께 추억으로 만든 웃음꽃을 헌화하며 돌아가신 분과 보낸 시간을 그리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