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말고 내가 직접 선택하는 콘텐츠
OTT의 장점은 단연 콘텐츠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지난 2022년, 좋은 기회가 있어 국내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OTT 회사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콘텐츠와 타사에서 수급한 콘텐츠를 합쳐 약 190여 개국의 작품을 볼 수 있다고 답했고요. ‘디즈니플러스’는 2021년 11월 한국에 론칭할 당시 약 만 6천 편으로 시작해 매달 5백 편 내외의 새로운 영상들을 업데이트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콘텐츠 왕국’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양입니다.
#콘텐츠 선택의 중요성
많은 콘텐츠를 특정한 주제나 관심사에 따라 수집하고 분류하며 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콘텐츠 큐레이션(Content Curation)’이라고 하는데요. 쉽게 말하면 이미 만들어놓은 콘텐츠를 목적에 맞게 분류하고 배포하는 일을 뜻하죠. OTT 플랫폼들은 콘텐츠 큐레이션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고 일어나면 OTT에서 매일 새로운 작품들이 출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OTT 이용자들 사이에선 콘텐츠 수는 많은데 막상 보려면 선택할 작품이 없다는 하소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물며 내가 볼 영상이 아니라, 자녀와 학생에게 보여줄 작품을 골라야 한다면 부모나 교육자 입장에서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닐 거예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심리적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너무 많은 콘텐츠가 쏟아지기 때문에 작품을 결정하고 보기까지 그 과정에서 피로감이 쌓입니다. 그렇다고 OTT에서 AI가 골라 준다는 추천 콘텐츠만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요. 적어도 OTT 서비스에서 ‘콘텐츠 큐레이션’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그 원리를 이해한 후, 청소년을 위한 영상물 선택법을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 OTT 콘텐츠 큐레이션의 한계
큐레이션(curation)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전시된 작품들을 기획하고 설명해 주는 큐레이터(curator)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미술 작품이나 유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큐레이터들은 관심을 가질 만한 작품들을 골라,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과 작품에 담긴 의미들까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 줍니다.
OTT에서 콘텐츠 큐레이션도 역할이 비슷합니다. 다양한 콘텐츠 중에서 사용자에게 가장 적합하고 흥미로운 콘텐츠를 선별하고 제공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사용자의 취향이나 관심사, 이전 시청 기록 등을 세밀히 분석해 개인화된 콘텐츠 추천을 제공하는데요. 이때 작품의 주제, 장르, 인기도 등을 따져 특정 테마나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모으고 이용자의 눈앞에 전시합니다.
OTT에서 제공하는 콘텐츠 큐레이션은 작품을 선별하고 필터링해서 제공해 주니 이용자들의 시간과 노력을 절약해 줍니다. 평소 무심코 우리가 고른 선택지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 분석해 개인의 작품 선호도와 행동 패턴을 해석해 주니 결국에는 이용자 개인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플랫폼 입장에서도 콘텐츠 큐레이션의 장점은 많습니다. 매일 늘어나는 콘텐츠들이 모두 양질의 영상물일 수는 없겠죠? 그런데 시청자들이 어떤 콘텐츠를 고르고, 어디서 빨리 감기를 하거나 재생을 멈추는지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으니 콘텐츠 품질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요약하면, OTT의 콘텐츠 큐레이션은 미디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효율성을 높이는 장치입니다. 콘텐츠 큐레이션은 사용자들이 좋은 콘텐츠를 더 쉽게 찾고 시청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OTT 플랫폼의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콘텐츠를 볼 때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것이 꼭 좋은 일일까요? 미디어 이용으로 재미와 의미를 같이 잡으려면 때론 빨리 가는 길보다 둘러 가며 우연히 보석 같은 작품을 만나는 경험도 즐겁지 않을까요?
OTT의 콘텐츠 큐레이션은 결국 나의 과거 선택이 담긴 기록들을 분석한 것이잖아요. OTT라는 숲 속에 아무리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해도 늘 발길이 닿던 산길로만 간다면 새로운 풍경을 경험할 기회는 줄어들고 맙니다. 그러니 평소에 즐겨보지 않던 장르도 과감히 선택해 보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영상물도 시청해 보면 어떨까요? 절대 공감할 수 없을 것 같던 낯선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도 막상 보다 보면 다른 인생을 이해하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청소년을 위한 콘텐츠를 선택할 때는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추천 알고리즘에 따라 자신의 관심사에 한정된 정보에만 의존하다 보면 이용자가 자신만의 거품 안에 갇히게 되는데요. 이를 ‘필터 버블(Filter Bubble)’라고 합니다. OTT 서비스는 그 속에 아무리 풍부한 콘텐츠가 있어도 과거 이용 데이터를 바탕으로 필터링된 정보만 이용자에게 전달하죠. 그럼 그동안 쭉 봤던 장르, 비슷한 줄거리와 캐릭터, 기존의 가치관을 확고히 만드는 주제의 콘텐츠만 줄 세울 가능성이 큽니다.
혹시 나만의 거품 속에 갇히면 취향을 거스르지 않는 작품만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편리함 뒤에는 '확증편향'이라는 결과가 뒤따라올 수 있어요.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견해를 확고히 하는 내용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자신이 좋아하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던 신념을 계속해서 확인하려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죠.
아직 독립적인 판단력을 갖추기 전인 청소년이 필터 버블과 같은 개인 맞춤형 콘텐츠 추천 시스템에 의존한다면 콘텐츠 홍수 속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시선의 작품만 볼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관점과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시점에 특정한 정보나 콘텐츠만 보는 것은 음식을 편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죠. 청소년들이 열린 마음으로 다채로운 콘텐츠를 먹어보고 그 안에서 좋은 영양소들을 골고루 섭취하여 세상을 보는 균형 감각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나에게 맞는 콘텐츠 선택법이란?
그럼 OTT에서 보호자와 청소년이 직접 적절한 콘텐츠를 선택하고 신뢰할 수 있는 플랫폼과 채널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OTT 플랫폼과 콘텐츠에 관한 정보들을 사전에 수집하는 것이 중요할 텐데요. 구체적으로 자녀와 학생에게 맞는 콘텐츠를 선택할 때 어떤 정보들이 도움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영상물의 등급을 확인해 자녀의 나이에 맞는 콘텐츠를 선택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는 청소년을 유해한 매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등급분류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요. 등급분류는 영상물의 내용이 어떤 나이에 적합한지 미리 알려주므로 콘텐츠 선택을 위한 유용한 정보가 됩니다.
나라마다 등급을 나누는 연령 기준은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경우, OTT에서 볼 수 있는 영화와 비디오물의 등급분류는 전체, 12세, 15세, 19세를 기준으로 이뤄집니다. 각급 학교에 입학하는 나이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영상물의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었느냐에 따라 5가지의 등급으로 나누어집니다.
당연히 연령이 콘텐츠를 고르는 절대적 기준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마다 영상의 내용을 이해하는 정도와 표현의 수위를 소화하는 수용도가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영화의 경우 ‘12세 이상관람가’와 ‘15세 이상관람가’의 작품은 해당 연령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부모 등 보호자를 동반한다면 관람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보호자가 곁에 있고 무엇보다 자녀와 학생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을 때를 말합니다.
보호자가 영상물의 연령등급을 확인하면서 더불어 챙겨보면 좋은 항목이 또 있습니다. OTT 콘텐츠 초기화면에 등급과 함께 표시되는 ‘내용정보’에요. 내용정보서비스란 소비자가 보다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영상물을 선택해 관람할 수 있도록 작품 내용에 포함된 유해 요소와 그 정도에 관한 정보를 담은 것입니다. 유해 요소는 주제, 선정성, 폭력성, 대사, 공포, 약물, 모방위험 등 7가지 항목이고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종 등급이 결정되는 거죠. 만약 중학생인 자녀가 볼만한 콘텐츠를 고른다면 일반적으로는 12세 이상관람가의 영상은 별문제가 없을 텐데요. 하지만 아이가 또래에 비해 폭력적인 장면에서 충격을 더 받는다거나 불안감을 느낀다면, 폭력성 요소가 거의 없거나 경미하게 표현된 작품을 고르는 게 좋겠습니다. 이제는 OTT 서비스를 이용할 때 첫 화면에 나오는 연령등급을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 이용자의 나이와 정서에 맞는 작품인지 살피는 루틴을 만들면 어떨까요?
그런데 이제 국내에서 OTT 사업자가 등급을 직접 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 혹시 알고 있나요? 이를 '자체등급분류제도'라고 부릅니다. 짧은 기간 OTT 콘텐츠의 양이 매년 늘어나다 보니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모든 OTT 영상물의 등급분류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정부에서는 국내 OTT 산업과 ‘K-콘텐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이 제도의 시행을 추진했습니다. 자체등급분류제도는 OTT 업체에게는 콘텐츠가 나오는 즉시 등급분류를 할 수 있으니 원하는 시점에 콘텐츠를 유통할 수 있다는 이점을 주고, 이용자 역시 기다리던 작품을 더 빠르게 만날 수 있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제도가 시행된 지 이 년이 지났는데요. 등급분류를 OTT 기업에 맡길 경우, 사업자들이 이용량을 높이기 위해 영상물의 연령등급을 낮춰 분류하지는 않을지 우려하는 시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물론 관계 기관인 영상물관리위원회가 모니터링을 철저히 하고 있고, OTT 사업자들도 책임감 있게 등급분류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연령에 맞는 콘텐츠를 소개하고 유해한 내용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보호자의 역할이 크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OTT는 연령 등급 정보를 바탕으로 필터링 설정을 적용해놓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미리 준비한다면 자녀와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답니다.
(*이미지 출처 : SBS 뉴스 [궁금한D] '버블에 갇혀가는 디디(DD)…혹시 나도?'(2019.08.16) 영상 中.)
출처 : 평화뉴스(https://www.p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