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자!
누구에게나 두려운 대상이 있다.
나는 계단을 두려워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케이블카에서도, 절벽 옆으로 유리 바닥을 깔아놓은 길을 걷는 것도, 아찔한 고공에서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그다지 두렵지 않다. 내겐 오직 계단이 문제다. 어린 시절부터 이상하게도 계단에서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잦았다. 층층대를 오르내리며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고 구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갓 대학생이 되어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기 위해 설레며 나서던 날은 집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구르는 바람에 파스 냄새를 풍기며 선배와 동기들을 만나야 했다. 첫 월급을 타서 근사한 구두를 샀던 때는 새 구두를 처음 신은 그 날, 계단을 내려가다 굽이 부러지며 발목을 다쳤다. 이후 계단을 걷는 별것 아닌 일이 나에겐 쉽지 않은 ‘별일’이 되었다.
사실, 모든 두려움에는 이유가 있다. 개가 무서운 이는 동네 어귀에서 사나운 개에게 쫓긴 기억이 있기 때문일 테고, 물이 무서운 이는 계곡이나 하다못해 욕조에서라도 물에 잠기는 공포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글쓰기가 두려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과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글을 쓰면서 부정적 사건을 경험했고, 그 기억이 감정을 건드려 글을 쓰려할 때마다 툭 하고 두려움이 솟아오르는 건 아닐는지. 글쓰기 자체가 부담스럽고, 내 글을 보여주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저마다 사연이 있다. 내가 만난 어떤 이는 십 년 전, 자신의 소설을 처음 읽은 친구의 악평을 들은 후,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이 무서워 그동안 쓴 글들을 서랍 깊숙이 감춰 두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글을 쓰는 일이 아니, 글을 써서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이 두렵지 않으냐고. 나 역시 지금 쓰는 이 글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읽을 생각을 하면 긴장이 몰려온다. 글을 쓰는 직업 중에서도 타인의 평가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직업이 바로 방송작가다. 기획안부터 구성안, 대본에 이르기까지 방송작가가 쓴 모든 글은 혼자서 완성할 수 없다. 초안을 쓴 후 늘 연출자나 선후배 작가들, 카메라 감독들, 진행자 등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글을 보여줘야 하고, 수정을 거듭해야 한다. 게다가 방송이 끝나면 곧바로 시청률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고 자아비판의 시간을 가진다.
“김 작가, 오늘 원고는 …….”로 시작하는 말을 살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함께 일하는 팀원들 중 나보다 경력이 많거나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줄 때는 내가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원고를 내밀며 손이 떨린다. 후배이거나 이 일을 갓 시작한 초보들과 일한다고 글을 보여주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에이, 경력 있다더니 프로도 별 것 없네’라는 말을 뒤에서 하는 것은 아닌지 뒤통수가 화끈거린다. 누구나 내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떨리고 긴장된다. 그러니 글 쓰는 일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다. 다만, 프로들은 그 두려움을 감추는 법을 알고 있거나, 또는 두려움으로 떨리던 순간보다 공감 가는 글로 인정받는 순간의 기쁨을 더 크고 가치 있게 생각할 뿐이다.
그래도 두려움을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때가 있다. 나의 방송작가 시절에도 몇 번의 슬럼프가 있었다. 방송작가 생활의 가장 큰 위기는, 라디오에서 일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났을 즈음, 다른 방송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찾아왔다. 라디오 글을 쓰면서는 처음부터 운 좋게 인정을 받았다. 방송을 듣고 공감이 되었다는 청취자들의 피드백도 심심치 않게 들었고, 새로운 코너를 가져가면 참신한 기획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가진 재주보다 과분한 칭찬을 받는 시간들이 이어지자, 정말 내가 방송 글 쓰는 재능을 타고난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던 중, 평소 선망하던 방송국에서 텔레비전 경력 작가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전까지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본을 써본 적이 없었기에 망설였지만, 선배의 추천으로 바로 면접을 볼 기회를 얻었다. 그동안 내가 썼던 기획안과 대본들, 방송 비평문 등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가져갔고 그 날 바로, 다음 주부터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라디오 글을 쓰면서 들었던 좋은 평판만을 믿고 덥석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 자리를 맡았다. 그즈음 내가 만든 첫 라디오 다큐멘터리가 수상한 직후라 텔레비전이라고 뭐 다르겠냐는 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의 악몽 같은 텔레비전 진출기가 시작되었다. 같은 방송 글이라 해도 라디오와 텔레비전 원고의 차이는 크다. 텔레비전 방송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상’도 글처럼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 같은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더라도 텔레비전에서는 화면으로 보여줄 거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영상을 글처럼 다루는 능력은 자료조사나 서브 작가들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기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수련의 시간을 거치지 않았으니, 촬영 구성안이나 편집 구성안을 쓰면서 헤맸던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함께 일하게 된 동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 작가, 그래서 뭘 찍으라는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스탭 회의 때마다 “김 작가 구성안에는 글만 있고 그림이 없어” 같은 냉혹한 평가들이 이어졌다. 회의 때마다 나 역시,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질문을 잘 못하면 “그것도 몰라?”라며 한심한 눈으로 쳐다볼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런 날이면 하루 종일 속상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가 퇴근길 아무도 없는 육교를 건너며 눈물을 펑펑 흘리곤 했다.
처음엔 회의 시간이 싫었다. 그게 누구든지, 내 글을 보여주는 순간들이 찾아오면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뭐든 쓰기 위해 노트북을 펼칠 때마다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픈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내 글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방송작가 일을 그만둬야 하나 스스로에게 의심을 품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던 글쓰기가 어느덧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어느 날, 프로듀서가 편집한 영상에 맞춰 원고를 쓰면서 한계에 다다른 나를 느꼈다. 드디어, 이 글을 끝으로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니,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아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마지막 글이 될 테니 “원고가 왜 이래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죠. 그래서 이 일 안 하려고요.”라고 말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타인의 평가가 상관없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원고의 빈칸을 채우는 손길에 막힘이 없었다. 마지막 작품이 될 테니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글을 쓰자는 생각에 평소보다 몰입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의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팀원들과 선배들에게 처음으로 “괜찮게 썼다”는 평을 들었다.
결국, 방송국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 막상 거기서 도망치려 하니, 이렇게 그만두면 앞으로 영영 글 쓰는 시간을 두려워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먼 길이 되겠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텔레비전 방송을 만드는 일이 처음인 내게 다큐멘터리는 당연히 벅찬 것이었다. 프로그램의 전체 틀을 짜고, 후배 작가들의 글을 조율하는 메인 작가라는 자리도 생각보다 책임이 막중해서 부담감이 컸다. 방송국 측에 다른 프로그램의 서브 작가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몇 개월만 고생하다 보면 적응하게 될 거라며 말렸지만, 매번 겁을 먹으며 글을 쓸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그 방법만이 글쓰기의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서브 작가에서 메인작가로, 처음 맡았던 시사 다큐멘터리 팀으로 돌아오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다시 맡게 된 프로그램에서 첫 아이템이 방송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작가실에 혼자 남아 3년 전 썼던 원고와 지금의 원고를 나란히 펼쳐 놓고 비교하며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그동안 영상에 대한 감각을 키웠고, 팀원과 글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차근히 풀어가는 방법도 배웠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가 두렵다는 이들을 만나면 아무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첫 문장을 열어보라고 조언한다. 한편의 글을 쓴 후, 이대로 내 서랍 속에만 감춰두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한 명의 독자라도 글에 공감해 준다면 좋겠다는 욕구가 생기면 그때, 세상에 내보이면 된다. 그리고 글에 대한 반응이나 타인의 의견을 감정이 아닌 이성이라는 필터에 한번 걸러내도록 하자. 공격적이거나 비난의 말들은 흘려보내고, 글에 대한 논리적 비판만을 모아서 새겨듣는 것이다. 타인의 말에서 감정을 담은 단어들을 덜어내고 나면, 생각보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표현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방송직에 종사하겠다는 후배들을 만나면, 반대로 부담감을 가지라고 권한다. 방송 글쓰기는 대중의 삶에 쉽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어제 방송에서 몸에 좋다고 나온 과일들이 오늘 마트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TV에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던 전문가나 진행자는 방송으로 쌓은 신뢰도와 평판으로 선거철을 앞두고 속속 후보로 등장한다. 그만큼 방송의 힘은 무섭다. 대중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주는 방송인지, 혹여 대중의 삶에서 합리적 선택을 방해하고 혼란을 주는 방송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나의 글을 세상에 내보내기에 두려운 지점이 있는가?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문자답을 이어가다 보면, 끝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방송작가의 수첩>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매거진의 글들은 수정, 보안하여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부족한 글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