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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 Nov 15. 2023

도시들의 술자리

독일을 다녀와 짧은 감상

어느 겨울 초입, 한 대학거리 술집에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입동에 익숙한 친구가 두어 명이었고 그런 건 신경도 안 쓰는 듯 비교적 가볍게 입고 온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술처럼 시간도 익어가고 어느덧 파리한 등불빛을 받는 시계 바늘은 밤 11시를 넘어간다.

결코 취하지 않을 성 싶은 성격의 파리는 양쪽 웃옷 소매를 걷고 눈만 마주치면 아양을 떤다.

'아~ 오빠 생각보다 술이 약하네? 야 희정아 희정아 더 마셔 언니가 더 부어줄게!!"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자궁에서부터 매력만 모아 눈 코입, 뼈와 살을 붙인 듯한 파리는 그렇게 도도하고도 사랑스러워 자신감으로 넘쳐난다. 

그 옆에는 팔짱 끼고 있던 런던이 툭툭거리다 가끔 점잖게 쌍욕을 한다. 

'이년 이거... 골빈 거 아냐?'

고학번의 여유가 서린 런던의 욕짓거리는 후배들을 웃기기에 충분하다. 런던과 파리는 아웅다웅하다가도 1리터짜리 맥주를 금세 함께 들이킨다. 기가 빨린다. 이런 미...ㅊ....

그러나 더 미친 자는 이미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뉴욕, 이 녀석은 이미 홀로 저세상에 가 있다. 지치지도 않는 체력, 그거슨 새벽 한 두시가 되어서도 조랑마처럼 날뛴다. 염색한 머리가 마치 번갯불처럼 왔다갔다한다. 돌고래와 파바로티를 오가는 저 다양한 음색의 목소리는 아무도 가늠할 수가 없다. 잠깐, 얘 지금 패딩 안에 반바지 입은 거야?


우당탕 쿵쾅

순진한 어린 양 뒤에 최대한 침착히 앉아있으려는 마드리드로마는 딱히 할 말도 없다. 음, 어, 뭐... 그런 거지. 둘 중 누가 먼저 술에 취했는진 몰라도, 누군가는 고즈넉이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지리하게 읊은 연대기를 외워보고 있다. 난 안 취했다고 스스로 증명하는 거다. 번번이 실패지만.


'워호우~! 예에!!!"


퓨즈는 나갔고 나는 어느 순간 가로등 앞에서 토를 하고 있다. 한쪽은 불야성이다. 뉴욕은 저만치 신나게 달려가고 파리와 런던은 가방을 부딪치며 깔깔깔 뒤따라 걸어간다. 반대편은 귀신이 나올법한 어둠. 이런 광경은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사실 토라고 해봤자 별 거 없지만 속은 너무나 메스껍다. 그때 누군가의 따스한 손이 내 등을 살포시 두드린다.

그는 아무 말도 없다.

'우엑'

도닥 토닥

겸연쩍게 티슈로 입을 닦고 그를 돌아본다. 아까부터 술자리에서 묵묵히 앉아있던 베를린. 그는 다른 짐승들의 광기와 허세, 정치질과 애드립에도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그건 여유가 아니다. 그런 미소를 뭐라고 할까..?


나는 그의 도움으로 택시에 올라탔다. 고맙다고 연신 말하는 나에게 그는 딱히 대답이 없다.

차가 출발한다. 나는 보았다. 그가 오래된 스마트폰으로 택시 번호판을 찍고 있는 모습을.


조용하고 자상한 녀석.

그 녀석이 아직도 내 등을 두드리고 있는 듯, 나는 뒷좌석에서 눈물을 똑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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