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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 Sep 30. 2021

미술을 뒤흔든 통찰들, <아트인문학>


그림은 이제 투명한 창문처럼 느껴져야 한다. - 알베르티


미술은 이제 보이는 걸 다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볼 수 없었던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 파울 클레



이것은 서양미술의 역사다.


미술의 굵직한 패러다임과, 그 패러다임의 전복을 가능케 한 통찰을 다룬 책 <아트 인문학>,

그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에는 위와 같은 말들이 적혀있다.



<아트인문학>은 총 10가지, 미술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개념'들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처음엔 각 장들이 흥미진진한 일화들로만 보였다.


그러나 두번째 읽은 후에는 모든 변혁의 '플롯'이 이해됐고, 그것들의 유기성이 한 눈에 보였다. 든든한 이해의 뼈가 생긴 느낌.(역시 책은 두 번 읽어야 제 맛)



크게는 고전미술/인상주의/현대미술로 나누어지는 미술의 패러다임은

각 서너개의, 총 10가지의 '통찰'들로 이루어져 있다.



15~ 16세기의 고전미술은 '원근법', '해부학', '유화', '명암법'


17~ 18세기의 인상주의는 '알라 프리마', '색채 이론', '현대성' 개념


19~20세기의 현대미술은 '표현' '추상' 그리고 '착상' 이라는 위대한 통찰들을 기반으로 한다.



이 작은 통찰의 벼락들이 부딪히고 서로 부딪치면서 낳은 것이

오늘날의 '미술'이란 알이다.



앞서 적은 알베르티와 클레의 말을 다시 보면 미술사를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요컨대, '보이는 것을 더 잘 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 인류의 역사다.

그리고 이는 책 제목에 쓰인 '인문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자연과학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탐구라면, 인문학은 삶의  이면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연과학이 통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했듯이 '패러다임'이란 말은 토마스 쿤이 고안한 개념으로, 그는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썼다.  시대의 주된 사고 체계와  끊임없는 변혁은 어느 학문에서나 일어난다. 다만 각각의 목적이 다를 .)


<아트인문학>에 등장하는 10가지 개념 중에 내가 특히 인상적으로 생각했던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명암법(Chiaroscuro)'이다.

명암법은 말그대로 그림 속에 빛의 콘트라스트를  뚜렷하게 담아내는 기법이다. 현대에서야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명암법은 카라바조라는 화가에 의해  잠재력이 발현되었다. 이때의 잠재력이란 단순히 사실성의 강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암의 강렬한 대비는 그림 속에서 공간의 사실성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 또한 발견되게끔 했다.


이른바 고퀄 회화의 절대 법칙이었던 '원근법'을 통한 공간의 사실성, 해부학을 통한 인체의 사실성은 이상적인 비례, 흠 잡을 데 없는 수식을 위한 토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간과 인물에 조명(기술)이 등장하면서, '완벽함'이 최고 가치였던 그림 안에는 '인물'의 내면이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이 법칙은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하다. 이를테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조명에 따라 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상의 라이팅을 낳은 것이 바로 회화의 명암법이다. 다음 두 그림을 보자.


(좌) 뒤러, 서재의 성 예로니모   /   (우) 렘브란트, 고뇌하는 예로니모


두 그림은 모두 예로니모 성인을 주제로 한다. 좌측은 비록 판화임에도 성인과 방 안의 사물과 상징, 그리고 창문의 빛을 사실적으로 훌륭히 담아냈다. 그러나 우측은 물론 창의 크기를 줄이기도 했거니와, 책을 보며 고뇌하는 성인에게 빛이 집중되어 있다. 똑같이 작업에 몰두하는 성인을 그렸으나, 좌측의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더욱 온전히 예로니모 성인의 내면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아트인문학>의 저자는 이를 두고 '사실성의 완성'이라 일컬었다.

즉, 겉으론 보이지 않는 '인물의 내면'을 담아내는 것이 온전한 사실성의 추구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실성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두고 판가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으로 보는 대로만 따라 그리는 것은 '실제 세계'의 절반 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는 눈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움직이는 다양한 마음이 있고 삶의 이야기가 있다. 이같은 이해는 어쩌면 세잔에 의해 시작된 표현주의의 원조격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내가 두번째로 인상깊었던, '표현(Expression)'을 소개하고자 한다.

표현. 역시나 지금의 관객에겐 너무 당연한 말인 듯 싶지만,

19세기 중반 세잔이 주창한 '표현'은 오랜 미술의 역사를 뒤흔들다 못해 붕괴시킬 만큼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개념이었다.


최대한 눈에 본 것과 가깝게 그리는 것이 중요했던 고전미술과, 눈에 보이는 빛과 색을 그대로 그리고자 한 인상주의. 모네, 르누아르... 익히 들은 화가들이 붓을 놀렸던 그 인상주의의 커튼 뒤에는 홀로 또다른 길을 걸은 세잔이 있었다.

고전미술이 극에 달해 있을 무렵, 사진술이 나왔고 세잔은 더이상 사실성만이 화가의 경쟁력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치열히 실험했고, 대상의 내면뿐 아니라 작가, 즉 화가의 내면 또한 그림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좌) 세잔, 생 빅투아레 산   /  (우) 세잔, 볼라드 박사의 초상화


세잔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그 이후 고흐를 비롯한 화가들은 초록색 얼굴, 보라색 하늘을 통해 자기 내면을 표현해냈다. 흔히 아는 수평이 맞지 않는 탁자, 각도가 미묘하게 어긋난 과일과 물병들이 세잔의 전부는 아니다. 입체적인 시선, 다양한 색과 빛의 표현은 결국 '인간의 내면'을 담으려는 아름다운 미술가들의 춤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렘브란트 그림이다.

더 정확히는, 인공지능이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수 천 점의 그림 기법을 분석하여, '40대 중반 남자 초상화를 그리시오'라는 명령어를 넣고 나온 결과다.


<아트인문학>은 이 그림에 대한 질문으로 미술사의 긴 여정을 일단락한다.

'이것은 예술인가? 아닌가?'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대상의 내면'을 담는 것이 사실성의 완성이었던 고전미술,

또 '화가의 내면'을 담고자 했던 세잔의 표현주의와 그것이 낳은 현대미술.


예술이란, 결국 '인간의 마음'을 더 잘 그려내는 길을 걸어온 게 아닐까?

따라서 예술의 본질, 핵심, 그곳에 나는 언제나 '인간'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더 과감히 말하면 인간 아닌 동물이라든지, 인공지능이 그려내는 그림, 내는 소리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답이다.


끝으로 예술을 꿰뚫는 통찰이 이러하다면,

나 자신에게도 한 번 묻고 싶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는 또 어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트인문학 #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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