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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 Aug 31. 2021

답답한 소설, 카프카의 <소송> 2

-2 인생이란 이름의 법과 구속

https://brunch.co.kr/@kidriver/75 <1편에 이어서 계속>


그렇다. K의 미래는 암담하다.


하지만 그 암담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암담함이 절정에 다다를 때, 절망 속에서 깨달음이 생긴다.





4. 법원의 이중성




<소송>에 나오는 법원은 전지전능 그 자체이다. 마치 모든 곳에 있으되 보이지는 않는 그런 존재. 그렇다고 해서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법원의 이모저모를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적일 뿐 비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앞서 변호사가 '청원서를 읽지 않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 보아도, K 외의 대부분 인물들은 법원이 가끔 답답한 짓을 저지르긴 해도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의 주인공 K가 그런 면에서 한 가지 잘한 것이 있다. 그것은 감독관과 감시인에게 체포를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후, 첫 심리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K는 그루바흐 부인에게 말했듯 이 소송 사태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법원이 말그대로 부조리한 집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 2장 '첫 심리'에서 이 작품이 그리는 세계의 독특한 면모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법원의 모습이 흔히 생각하는 거대하고 위엄있는 건물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심리가 열리는 장소라든지, 법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들은 대중이 없이 도시 곳곳에 퍼져 있다. K는 미국 뉴욕으로 치면 다소 가난한 워싱턴 하이츠 같은 곳에서 집집마다 방문하며 첫 심리 장소를 찾아다닌다. 오랜 시간 발품 팔아 결국 공간을 찾긴 찾는데, 일반 가정집 문 뒤편으로 이어진 그 장소엔 강당이 있고 그곳엔 군중이 좌우로 나뉘어 앉아있다. 그리고 단상 중앙에는 예심 판사가 있다.



예심 판사 앞으로 걸어나간 K. 판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K는 간덩이가 부은 듯 법원을 통렬히 비판한다.




"예심 판사님...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소송 절차의 한 보기입니다."


어디선가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박수를 치며 외쳤다. - 브라보! 옳소! 브라보!


그는 ... 가끔씩 그의 말에 공감하여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그런데 앉아있는 군중들 중 한 편이 환호를 보낸다. K는 이들이 천사/악마 편으로 의견이 갈리듯이, 적어도 한 쪽은 자기 의견에 동의할 거라 생각하고 자신감을 얻는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산.



'그는 무작정 연단에서 뛰어내렸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얼굴들이라니!... 보이는 범위 내에서는 모두가 이 배지를 달고 있었다. 겉보기에 좌우의 두 당파로 보였던 그들은 모두 한패였던 것이다... 예심 판사의 옷깃에도 똑같은 배지가 보였다.'


"이제 보니 당신들 모두 관리들이로군. 조금 전 내가 공격했던 바로 그 부패한 무리들이야. 당신들은 이곳에 몰려... 겉으로는 파당을 이루고서 한 무리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박수를 쳐 댔던 거지."




법원은 존재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나, 사실상 그들은 자기 권력이 팽배해있음을 여러 인물들의 입과 '공간'을 통해 입증한다. 이 배지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앞서 법원의 '드러낼 듯 말 듯 드러낼 것 같은' 특성들은 변호사, 화가, 그리고 K가 변호사와 해약할 때 만나는 상인 블로크의 입에서 줄기차게, 신명나게 설명이 된다.




법원의 애매모호한 태도, 이중성, 그리고 가식. 이들은 K의 체포에서 감시인이 한 말과, K의 비극적 결말부 모두에 드러난다.




"당신한테 이렇게 친절히 충고를 드리는 것도 내 임무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당신의 감시인으로 배정된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런 행운이 따라 준다면 당신의 일은 낙관해도 좋을 거요."




'한쪽 남자가... 정육용 칼을 빼서 높이 쳐들더니 칼날을 달빛에 비추어 살펴보았다. 다시 또 그 역겨운 의례적인 양보 놀이가 시작되었다.'




역겨운 의례적인 양보.


어차피 총으로 노예를 쏴 죽일 것이면서 피를 묻히기 싫은 척 교양 떠는 귀족들이 떠오른다. 법원은 이렇듯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규칙으로 굴러가면서, 끝까지 점잔을 뺀다.

하지만 그런 이중적이고 나사 빠진 것은 법원 뿐이 아니다.

이유 없이 체포를 당했음에도 자기 체면을 생각하고, 자신을 도와줄 지도 모를 사람들을 두고 여자와 밀회를 즐기는 K도 애매함의 대가다.


그리하여 <소송>은 총체적인 답답함으로 무장한 소설이다.


하지만 이 고구마 향기,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5. 답답함의 정체




'지금 이 모양인데, 나중에는 과연 어떤 지경이 될 것인가? 얼마나 끔찍한 날들이 앞에 가로놓여 있을까! 온갖 난관을 뚫고 좋은 결말에 이르는 길을 그가 과연 발견할 수 있을까?'


궤변만 늘여놓던 변호사와 해약을 한 이후, K는 스스로를 변호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변호사를 욕하던 그도 실제론 아무것도 못하는 고구마 대식가에 불과하다. K의 미래는 점점더 어두워진다. 그에게 남은 것은 유죄 판결 뿐이다.



하지만 독자는 여전히 K가 뭘 잘못한 것인지 전혀 모른다.



만약 K에게 죄가 있다면.. 대체 무엇이 죄란 말인가?

그가 소송을 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K의 무엇에 대한 소송이란 말인가?



K는 은행 업무의 일환으로 점장의 지인인 이탈리아인에게 대성당을 구경시켜줘야 했다.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업무이기 때문에, K는 이탈리아어를 배운 기억을 되새기며 하루 가이드 역할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인은 약속 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고, K 혼자만 대성당에 남게 된다.K는 그곳에서 미사를 준비하는 듯한 신부를 발견하고, 그를 유심히 관찰해보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성당을 떠나려 한다.


그러나 바로 그때, 신부가 외친다.



'신부는 일반 신도를 향해 외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도 뚜렷하여 도저히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그는 바로 이렇게 외친 것이다. "요제프 K!"'



신부가 K를 부르듯이, 우리 자신의 이름을 이곳에 넣어보자. 제단에 서서 나를 부르는 저 목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당신의 소송은 아마도 하급 법원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당신의 죄가 입증된 것으로들 여기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죄가 없습니다... 그건 오류입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모두 인간들 아닌가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말입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죄 있는 자들은 늘 그렇게 말하곤 하지요."




이때의 죄란, 기독교적인 관점의 '죄'를 얘기하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소송>의 깜찍한 특징이 뭔가. K를 제외한 이 모두가 (어쩌면 K도) 법원과 관련이 있다. 신부도 법원 사람이다.


신, 절대자와 비슷하나 결코 그와 동일하지는 않은 '법원'이 <소송>의 무대이자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인간이란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되느냐'는 K의 물음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더 나아가 '소송'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라면 겪을 수 밖에 없는 사실에 대한 항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송'이란 결국 인생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일컫는 게 아닐까?


삶 자체가 거대하고 모순된 소송이며 난제 아닐까?




이쯤에서 변호사의 해약 전 마지막 대사를 보자.


"피고들은 바로 세상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죄 때문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있을 벌 때문도 아니지요... 그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 제기된 후 어떤 식으로든 그들 몸에 늘 붙어 다니는 바로 그 소송 때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생을 관통하는 법이 있다면 두 가지, 탄생과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수많은 고뇌들, 개개인 각각의 몫으로 남아 인간 존재를 괴롭히는 그 고뇌들도 있다.


살아가는 과정 자체는 논리적인 문제로 둘러싸인 것 같아도 실상 비논리적이고 황당한 일들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투쟁적이다. 이로부터 초탈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K는 처음 감시인들을 보고 의문을 갖는다.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어느 기관에 속해 있는 자들일까?'


K가 설령 답을 내렸대도,

그것은 독자의 답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의 문제를 규정하고 투쟁하는 일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때로는 규정하는 것 자체도 투쟁이다.




6. 벗어나는 길



"개 같은 결말이로군!"


K는 결국 유죄를 받고, 처형 당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과 함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미완성된 장들도 있지만, 그것 역시도 아마 앞과는 별 다르지 않는 특성들을 갖고 있다( = 고구마).



어쨌든 <소송>은 총체적인 답답함이며, 그것은 답 없는 인생의 문제들, 소송과도 같은 삶을 형상화하는 것만 같다.


<소송> 읽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그런 것이다.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K도 겪는 것에 대한 안도감. K가 아무리 헛발질을 하여도 결국 나 시 그러하다는 것, 또 나는 피고인 동시에 원고이기도 할 것이며, 누군가의 법원 혹은 내가 만든 법원에 꼼짝없이 갇혀,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면 쉽게 끝낼 수 있는 상황을 괜히 복잡하게 늘여버릴 수도 있다는 것.



기원을 모르는 이 복잡한 미로에서, 결국 헤쳐나가는 몫도 나의 것이다.

탈출까진 아니더라도 팔은 한번 휘저어 볼 수 있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작품에서 K와 마지막으로 가장 긴 대화를 나눈 대성당의 신부는 '문지기' 이야기를 언급한다.

(작품 속에선 상당히 길게 나오므로 간단 요약)


- 법의 문 앞에 문지기가 있고, 시골 남자는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지만 문지기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 문을 통과해도 그 다음, 그 다음 문들이 이어져 있고 갈수록 통과하기 어려워질거라 말한다. 시골 남자는 문지기를 설득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바치고 노인이 된다. 똑같이 나이 든 문지기는 마지막 순간에 그냥 문을 닫아버리겠다고 말한다. -



K는 문지기가 남자를 기만했다고 하지만, 신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상 남자는 문지기를 설득하며 시간 보낼 것이 아니라, 그저 문으로 나아가기만 했어도 됐을 거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면 문지기가 막으려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그 다음 일은 어떻게 예상하겠는가?


요컨대 시골 남자는 괜히 머리 굴리다가 세월을 다 낭비했다.


'이런 상황에 지금 은행 일을 보고 있어야 하는가? 고객들을 불러들여 상담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소송은 계속 굴러가고 있고 저 위 다락층에선 법원 관리들이 그의 소송 서류들을 들여다보며 앉아 있는데, 어떻게 은행 업무에나 매달려 있어야 하는가?...'


시골 남자는 K와 같다. K는 미적대는 변호사 때문에 첫 청원서조차도 신속하게 작성하지 못한다. 보다 못해 직접 작성하려 하지만 뭐라써야 할 지도 모르겠고, 그러자니 은행 일은 해야 할 것 같고, 하지만 소송은 심각해보이고... 어디에도 집중을 못한다. 그러니 대처 역시도 그저 늦어질 뿐이다.


'어쩌면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이 사건 전체를 가장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런 답답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의 단서는 역시 이 문장인 것 같다. '극단'의 의미도 독자마다 다르겠으나, 어쨌거나 K가 머리로만 떠올리고 실천하지 않은 무언가가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삶의 문제 앞에 마냥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 보면 진전은 없다. 이전과는 다른 극단적 행동과 실천이 오히려 해결을 낳을 수 있다.


물론 '극단'이란, '소송'의 정체만큼이나 개개인의 삶에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또 반드시 그것이 '행동'일 필요는 없다. 극단적인 사고, 생각의 전환도 극단의 일종일 수 있다.



이제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삶이 너무 확실히 어둡거나, 확실히 밝은 때는 이 작품을 권하지 않는다.

삶의 명암이 확실히 구분이 되는 시기엔 답도 너무나 쉽게 내려지고, 그러면 <소송>을 끝까지 읽어나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까닭 모를 어떤 문제가 안개처럼 나를 혼란시키고, 무언가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마냥 내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 <소송>을 펼쳐보라.


이열치열이란 말처럼, 소송에 빠진 K를 보며 내 삶의 법과 구속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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