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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동 Aug 30. 2021

답답한 소설, 카프카의 <소송>

-1. 이 소설이 답답한 이유


'주인공 요제프 K가 처한 소송 자체와, 법원 사람들의 부조리함 또 그럴 듯 하지만 사실 아무런 실속이 없는 발언들과, 그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나사 빠진 행동들과 무능한 조력자들과 영원히 소송의 내용을 알 수 없을거라는 암담함이 나를 총체적으로 미치게 만든다.'


라고 이 소설을 절반 쯤 읽었을 때 나의 일기에 적었다.



도서관에서 <소송>을 빌릴 때만 해도 나는 대강 <베니스의 상인>같은 이야기인가 싶었으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내용은 그 작품의 재판보다 갑절은 더 이상하고 황당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이상한 것인지, 그냥 덮어버리고만 싶어지는 소설이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읽고 싶고 고민해보고 싶은 소설이다.



그래서 일기에 해당하는 내용의 근거 일부를 발췌해 정리해보았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였다.

물론 '총체적인 미친 상태'를 만드는건 이 모든 대환장의 '결합'에 기인한다.





1.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송



요제프 K(카)는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갑작스레 '체포'를 당한다. 감시인 둘은 K가 소송에 놓였다고 말하며, 그를 위해 만들어졌던 아침 식사까지도 뻔뻔하게 먹어치운다. 얼마 후 감시인들을 이끄는 감독관이 나타나는데, 이때부터 이 소설이 보통 이상한 소설은 아니라는걸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은 단지 체포되었을 뿐이라는 것,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것을 알려야 했기에 그렇게 했고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고 우린 이제 헤어져도 됩니다... (체포되었다는) 그 사실이 당신이 직장에 나가 일하는 것을 가로막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체포되었다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군요."

"난 나쁘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체포 사실을 알리는 것도 꼭 필요했던 일 같지는 않군요."



말장난 혹은 뜬구름 잡는 소리에 가까운 대화를 보다보면 오직 한 가지의 의문만 떠오른다.


"그래서 대체 '왜' 체포된건가?" "무슨 소송을 의미하는건가?"


형사인지 민사인지, 사기죄인지 강도죄인지 아니면 경범죄인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텍스트는 알려줄 생각조차 없어보인다. 장장 (을유버전) 300페이지 넘도록 절대 밝혀지지 않는다. 이야기에서 사건이 터지면 그 원인이 밝혀지는 것이 플롯의 기본이요 인간의 본능적인 기대인데, <소송>은 그게 없다.


한편 감독관의 대사를 살펴 보면, "직장에 나가는 걸 막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불구속 체포인건가?


일단 <소송>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원칙들을 그대로 기대하는건 아니될 말이다. K는 감독관 옆에 그의 은행 직원들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그들은 K의 일상에서 K를 지켜보는 일종의 감시자 대리인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놓고 강압적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따라서 일면 K는 자유로운 상태에 놓인 것 같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K가 체포 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송>이 가져다주는 답답함은 여기서 나온다. K는 체포된게 분명한데, 주변인들은 그를 당장에 감옥에 처넣거나 신속하게 재판을 하지 않고 뭔가 방치해놓는 듯하다. K는 여차하면 멀리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K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소송을 진행하는 '법원'은 하수구의 쥐새끼처럼 은밀한 동시에 아주 대놓고 뻔뻔하게 일을 진행한다. 제발 한 쪽만 선택하면 좋은데 전혀 그러지 않는 법원이, 독자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다.



감독관이 떠나고 K가 직장에 버젓이 다녀온 후, 머무르는 집주인 그루바흐 부인과의 대화를 보자.



"당신이 체포되었다곤 해도 도둑처럼 체포된 것은 아니잖아요... 이런 체포는... 어딘지 학문적인 것처럼 여겨져요... 그것은 제가 잘 모르고 사람들도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무언가 학문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부인께서 말씀하신 것은 전혀 어리석은 게 아닙니다... 저는 일 전체를 부인보다 더 예리하게 판단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 일을 그냥 어떤 학문적인 것이라고는 보지 않고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봅니다."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학문적인 것'은 대충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어쩌면 학문적 '연구'처럼 일종의 시험대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그렇다고 K가 처한 상황이 K가 말한대로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독자는 K에게 현혹될 수 있다.





2. 고구마를 먹은 K




이어지는 그루바흐 부인과의 대화 내용은 이렇다.


"K씨,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일을 어렵게 생각한다고 보지 않는데요." (웃기고 있네)


 이런 당당하고도 뭔가 논리정연해보이는 K의 말들에 독자는 K가 처음엔 답답하게 굴어도 나중엔 논리적으로 승리하겠구나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랬다.


아침에 감독관을 만난 방은 뷔르스트너라는 여성의 방이었는데, K는 그들 때문에 방이 어질러진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밤늦도록 뷔르스트너 양을 기다린다. K는 자신이 처한 복잡(제 딴에는 아무것도 아닌)한 상황을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고, 뷔르스트너는 K에게 언뜻 희망적인 말을 건네는 듯 싶었는데.. K는 갑자기 뷔르스트너 양에게 키스를 한다.



이 상황에?  그렇다.



'K는 말하면서 달려오더니 그녀를 붙잡고는... 목마른 짐승이 마침내 발견한 샘물을 마구 혀로 핥아 대듯이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잠들기 전, 잠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그는 만족스러웠다.'



황당한 소송 상황에 한줄기 빛같은 여성에게 키스를 했다는 건 그렇다치자. 뷔르스트너 양이 K에게 호감을 표시한 것도 아닌데 키스를 짐승처럼 퍼부었다는 것도 일단은... 차치하고 보자. 그러나 K의 이런 여성 편력(달리 표현을 모르겠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중에는 숙부 인맥으로 자기 변호를 맡은 변호사를 만나러 갔다가, 그 집에서 일하는 레니라는 여성과도 초면에 진득한 밀회를 하고 앉아있다. 자기를 도와줄 변호사와 높은 분으로 보이는 사무처장은 안중에도 없다.


그만큼 답답한 것은 K의 혼자 똑똑한 척 하는 정신승리적 태도들이다.



'어쩌면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이 사건 전체를 가장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꼼짝 못하게 붙잡을 것이고, 이어서 그가 바닥에 내던져지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가 그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 것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었다. '



이렇게 응원하고 싶으면서도 응원하기 싫은 주인공 찾아보기도 어렵다.








3. 조력자들의 헛소리



이런 구제불능 K를 도와줄 것만 같은 인물 둘이 등장한다. 하나는 숙부의 친구 변호사이고, 둘째는 은행 고객인 제조업자의 소개로 만난 (법원) 화가이다. 예상했겠지만, 이들은 도움이 안된다. 특히 변호사의 기나긴 헛소리는 가관이다.



"나는 이미 이와 유사한 많은 소송에서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승소를 했습니다… 내가 이 모든 소송들을 통해 얻게 된 큰 경험은 이제 물론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는 당연히 즉시 일에 착수했고 첫 청원서는 이미 거의 다 완성되었습니다..."



소설의 3분의 1을 조금 지날 무렵 변호사의 이같은 말은 가뭄의 단비처럼 희망을 준다. 비록 K가 얼마 전 변호사를 만나는 날 레니와 딴짓거리를 하느라 정신이 팔렸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B.U.T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 첫 청원서는 보통 다른 곳에 잘못 가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분실되는 일이 다반사이며 ... 그것을 읽어보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심한 일이긴 하지만 전혀 부당한 일만은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수월하게 진행되는 건 하나도 없으며, 이에 뒤따른 황당한 논변은 답답증을 강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재판은 공개적인 것이 아니며... 법률은 공개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유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첫 청원서는 사실 우연이 아니고서는 무언가 소송에 의미 있는 내용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변호인은 당연히 매우 불리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의도되어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사법부에 의해 공인된 변호사란 없는 것이며... 무면허 변호사들에 불과한 셈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법원에서 변호사들은 피고에게 불필요한 존재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을 겁니다."



이런 지속되는 희망고문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헛바퀴질에 K는 질색하고, 변호사 의뢰를 철회하기로 한다.


무능한 변호사를 떠나 K는 다소 비공식적인 루트로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하는데, 은행 고객과의 친분으로 티토렐리라는 화가를 만나보기로 한 것이다. 고객의 말에 따르면 화가는 법원 사람들과 '연줄'이있는 인물이었다.


참고로  K가 지금까지 만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부 법원과 연관되어 있다. 한마디로 세상이 법원이다. 누가 대법원장인진 몰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화가 집 문앞에서 노는 부랑아 소녀들조차도 법원의 눈과 귀와 같다는게 밝혀진다. 한마디로 K가 처한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하지만 짤린 변호사마저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변호사의 개인적인 연줄이며, 바로 그것에 변호의 핵심적인 가치가 있는 겁니다."라고 말한 바도 있으니 판사들과 연줄을 가진 화가야말로 실질적인 대책이 되어줄 것만 같다.


그러나 화가는 변호사보다 더한 강적임에 틀림없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실제적인 무죄 판결과 가상적인 무죄 판결 그리고 판결 지연이 그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소송들을... 최대한 주의 깊게 지켜보았지만 단 한 번도 실제적인 무죄 판결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상적인 무죄 판결과 판결 지연은 무엇인가?

전자는 일시적인 무죄판결이며, 차량 유지비 내듯 매년 법원 요구에 주기적으로 불려 나가야 하는 것이고 얼마든지 다시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활짝 열려있다.


후자는 그저 판결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는 것이다. 될 수 있는 데까지, 집안 기둥까지 뿌리뽑아 일단 미루고 본다.


한마디로 K가 무죄를 받고 소송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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