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8일, NASA 화성 프로젝트의 주인공 퍼시버런스(Perseverance) 호가 화성에 착륙했다. 생각보다 깜찍하게 생긴 이 로봇은 화성 토양 시료를 채취하는 임무를 띠고 지금도 열일 중이다. 이 로봇의 무게는 1,025 kg 이다.
미니 쿠퍼보다 좀더 가벼운 이 로봇은 아마 각종 최첨단 우주과학 기술의 보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로봇이 머나먼 우주로 가장 많이 싣고 간 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지구인들의 이름이다.
퍼시버런스호가 떠나기 전, NASA는 웹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로봇에 이름을 새길 지원자를 모집했는데, 그 수가 지구촌 통틀어 천만명을 넘는다. 직접 가는 것보다야 못하지만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참여했고 한국인도 20만명이 넘는다 한다. (나도 이번 기회에 2026년 탐사선 지원자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NASA는 왜 로봇만큼 깜찍한 그런 이벤트를 열었을까?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사람들을 북돋기 위해 해준다는 선한 의도를 위해서? 허나 무언가 부족하다. 그게 왜 ‘좋은’ 의도란 말인가. 특별해서? 사람들은 분명 로봇에 (그것도 아주 조그맣게) 이름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특별한 일을 했다고 믿는다. 왜?
이름에는 자기 존재의 본질이 담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는 ‘본질주의’에 대한 책이다. 뜻은 간단하다. 사람들은 사물에 고유한 본질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외형과는 상관이 없다. 어떤 존재에게는 대체할 수 없는 그것 고유의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연예인과 악수를 한 손을 씻지 않으려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닐던 동네를 괜히 한번더 구경가게 된다. 그/그녀의 본질이 묻었거나 담겨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본질을 에너지라 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에너지 보존 법칙에서 일컫는 그런 에너지는 아니다. 책에서 든 사례로는 케네디 대통령의 줄자를 몇 천달러에 구입한 사람, 아기의 애착 인형을 똑 같은 모습의 인형으로 대체해도 아기는 원래의 인형을 원한다는 실험 등이 있다. 케네디 대통령 자체의 E가 줄자에 담겨있기를 기대했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아마 유일무이한, 그리고 JFK만이 겪었던 어떤 사건들의 의미, 그 ‘특별함’이 줄자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줄자를 산게 아닐까.
본질에 대한 믿음은 상상력의 굳건한 기반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해리포터를 읽으며 우리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모티프가 된 인물은 있을지언정, 과연 어디에 해리와 론이 있고 호그와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진짜인것마냥 살아간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해리포터 기념품점은 밤이 깊어가도록 미어터질 지경이다. 그곳에 있는 목도리라든가, 열차 티켓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진짜 마법사들이 쓰던 것도 아니고 실제로 영화에 나온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걸 사고 만족해한다. 왜? 그건 우리가 그것들을 ‘본질’이 담긴 사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실체가 없더라도 본질에 대한 믿음만 유지될 수 있다면, 상상의 세계는 실재하는 것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우리 삶을 뒤흔들 수 있다.
그럼 사람의 ‘이름’은 어떠한가? 사실 사람의 이름이란 실존하지 않는다. 흰 것 위에 검은 글자를 써서 내 이름이라 하면 그제야 남들이 알아듣기는 한다. 하지만 이름은 만져볼 수도 없다 - 다만 들을 수만 있다. 또 이름엔 다양한 의미들이 붙기도 한다. 히틀러, 같은 이름은 악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부처는 관용과 자비의 상징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고유한 ‘언어’가 된다.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본질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것에 육체가 없고 향기가 없더라도 그것은 실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을 화성으로 보낸다. 사실상 가장 안전하게 화성에 가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