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동 Nov 18. 2021

'수험생 여러분'이었던 그 날

수능날의 의미

1. 부끄러움


11월 모 일, 또 다음 해 11월 모 일.

나는 수능을 두 번 봤다.


두 번째 수능 며칠 전 나는 나에게 약속했었다.


'마지막 종이 울리는 순간부터, 다시는 1분 1초도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겠다.'


이 결심은 고3 그리고 재수 때만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하기 얼마 전, 식당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다 울었다.

누가 보면 고등학교가 아니라 군대나 감옥에라도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너 고등학교 가면 국영수만 하고 살아야 돼.'


나는 내 인생 3년을 그런 것들에만 쏟고 싶지 않았다. 우습지만 일단 사회랑 과학이 있었고 (...더 좋아했다),

나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상상에 푹 빠져 살고만 싶은데, 

왜 좁아터진 교실에서 주먹 만한 크기의 문제들만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세상에는 국영수 학과공부 말고도 영화도 있고, 음악도 있고, 재미난 책들도 많잖아?


그러나, 첫 입시 결과가 나온 후 난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그 시간을 연장했다.

돌아간다 해도 번복하지 않을 선택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리하여 다시는 그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나에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란 가면 갈수록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수능날이란 '부끄러움'의 날이다. 



2. 애증


수능을 증오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나는 수능을 애증한다. 마치 내가 사는 서울이란 도시처럼.


재수 때 나는 내 공부법을 깡그리 갈아엎으려고 노력했고, 상당한 결과를 얻어냈다. 

또한 재수 때의 텍스트 공부법들이 대학에서의 공부에도 도움이 됐다. 


난 수능 공부 자체보단 그것 하나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 사회,

타인의 시선과 압박, 끊임없는 비교의 덫이 학생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갉아먹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여 나는 수능 공부를 아주 끔찍하게 여겼으나

한편으론 그로부터 배운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무엇보다도, 내 생애 무언가를 향해 벼랑 끝에 매달린 것처럼 피땀을 쏟았다는 사실과 뒤이은 성취,

기쁘면서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그 순간은 내 기억의 바다에 빙산처럼 굳어있다. 


수능이 끝난 후, 나는 내가 가장 공들여 정리한 사탐 노트, 처음 받은 수학 교재, 의미 있는 지문이 많았던 EBS 기출 교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기로 했다.


아, 그 수많은 지문들 중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한 구절이 있다.

'두려움은 언제나 총체적인 것이다.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대학에 가서도 가끔씩 그 구절을 떠올릴 때가 있었는데, 참으로 기분이 오묘했다.

그토록 고통스러웠으나, 이처럼 희망적일 줄이야.

그래서 수능은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3. 미안함


재수를 선택할 때 나의 감정은 복수심에 가까웠다. 

나를 떨어뜨린 대학에 대한 복수심 (...), 그리고 여러 개인적인 복수심들. 


문제는 수능날이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 속 복수심이 크레센도로 엄청나게 커져만 갔다는 것이다. 


급기야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대학 붙자마자 노래를 들어야지. 곡은 'The Winner Takes it All'이다.'


ABBA의 이 곡은 다들 아시겠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이전 연인에게 부르는 노래이다.

(수능 이후에 웃겠다는 건지 울겠다는 건지...)


하지만 나는 제목에 강하게 꽂혔고, 이 곡을 들으며 성취감을 맛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학에 합격하는 날이 왔다. 

이제 이 노래만 들으면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곡 외에 다른 어떤 신나는 노래들도 들을 수 없었다. 해방감은 강렬했으나, 그것이 통쾌함은 아니었다.

나의 전투적인 공부는 섀도우 복싱과 같았다. 난 대체 누구와 싸운 것일까? 

과연, 그들이 나와 싸우긴 한 것일까? 


내가 입시로부터 해방된 그 순간에, 누군가는 분명 나처럼 n수를 결정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 아픔을 아는 나는 도저히 자축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작년의 나를 두고 비웃음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른 수험생과 싸운 게 아니라, 괴물같은 사회에 의해 고통받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난 알았다.

승자가 있는 곳엔 언제나 패자가 있음을. 기쁨 옆에는 언제나 슬픔이 있음을.


이 세상 어느 곳에도 한 가지의 감정만 존재하는 시공간은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정말 미안했다. 죄없이 나의 전투 대상이 된 수험생들에게 미안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괴롭힌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그리하여 수능날이란, 

내가 치른 그 날부터 오늘 이 때까지, 수험생 여러분에게 참으로 미안한 날이다. 







매 수능날 난 아직도 시간표를 검색해 본다. 5교시가 끝나면 절로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거리와 인터넷 사이트 곳곳의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는 문구를 보면 여전히 울컥하다. 얼마나 수고했는지 알고 있다. 그 수고에 비해 대가는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실로 오랜만에 맞는 자유로운 저녁, 그냥 한숨 푹 잤으면 좋겠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다가올 내일도 변함없이, 그대들은 소중하고 위대하다. 











 



작가의 이전글 '상상'에도 종류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