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가 인류의 역사를 설명한 이유

'사피엔스 '를 읽고.

by 고블린 연구소

처음에는 그저 역사 서적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구석에서 근근이 연명하던 호모 사피엔스 종이 결국에는 지구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글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다 읽고 보니 이 책의 방점은 인류의 놀라운 진보와 발전과정을 조명하는데 찍혀 있지 않았다. 저자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600페이지에 걸쳐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작가는 사피엔스의 역사를 좀 큼직한 단위로 구분하는데, 예컨대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기존에 접했던 자질구레한 시대 구분이 아니라, 인류의 삶을 비약적으로 변화시켰던 포인트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조망한 점이 신선했다.


그중 가장 기발했던 시점은 인지혁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지혁명’이라는 용어 자체도 처음으로 접했다. 사피엔스 종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리가 하나로 힘을 합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신화나 공동체 같은 먹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개념을 공유하는데, 이러한 무형의 구심점을 인지함으로써 대규모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힘을 바탕으로 들판의 경쟁자들 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다른 동물들은 물론이었고, 생활 터전이 겹치고 행동양식이 유사했던 호모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다른 호모 속 인간들을 제압해 나갔다.


사피엔스 집단은 점점 커지고, 수십만에서 수천만 인원이 구성원이 되는 도시나 국가로 발전한다. 거대해진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인류는 좀 더 세련된 신화인 종교나 이데올로기 등을 만들어 낸다.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는 군대, 경찰, 법원, 학교 등을 만들어 사람들이 정해진 사고방식 내에서 행동하고 판단하도록 끊임없이 통제해 왔다. 지금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결국은 그동안 받은 교육의 결과라는 점이 섬뜩했다.


농업혁명의 시작과 전개는 익숙히 알고 있는 데로 펼쳐진다. 농업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더 이상 험한 산과 추운 강을 헤매지 않고 한곳에 정착해서 아늑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대규모의 밀과 쌀농사가 오히려 인류를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을 가꾸느냐고 일하는 시간은 수렵채집 시절보다 늘어났고, 피땀 흘려 노력해서 늘어난 잉여생산물은 소수 엘리트 계층이 독차지했다. 탄수화물 위주의 편향된 식사와 대규모 집단생활은 전염병의 창궐을 쉽게 했다. 흉년이 들면 베고픔을 견뎌야 했고, 풍년이 되면 도적 떼를 걱정해야 했다.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노동과 걱정의 크기는 오히려 증가했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삶을 크게 바꾼 것은 과학혁명이었다. 이 시기에 사피엔스들은 자신들이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지도를 그릴 때 가보지 않은 곳은 상상으로 채우기보다는 빈 공간으로 남겨두기 시작했다. 이 시점을 혁명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은, 인류는 답을 얻기 위해 더 이상 하늘을 향해서 두 손 모아 기도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과거의 예에서 통계를 내고, 나침반과 수학에 의지해서 대양을 건넜다. 인류를 다른 세상에 데려다주던 범선은 우주선으로 발전했고, 실험실의 과학자들은 유전자를 조작하여 원래 없던 특성을 생물에게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왜 사피엔스가 그토록 과학과 기술에 진심이었는지 하는 이유다. 진리에 대한 탐구나 인류의 행복과 같은 멋진 장식도 가능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더 잘 살기 위해서였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돈 때문이었다. 과학, 자본주의, 제국주의는 강력한 삼각편대를 이루어서 인간의 지적 수준과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으나 그 원동력은 결국 사피엔스의 이기심이었다.


코스모스, 총균쇠등의 계보를 잇는 벽돌책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완독할 수 있었다. 길고 긴 인류 역사를 조망하며 빠르게 비행하다가도, 흥미로운 지점에는 잠시 착륙해서 그 시절을 생생하게 눈앞에 재현해 주었다. 중세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의 분주한 장터를 거니는 가하면, 위대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가 세운 비석도 구경할 수 있었다. 같은 종교를 공유함에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던 가톨릭과 개신교의 싸움터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1700년대 초까지도 세계경제를 주도하던 아시아 국가들은 어느 순간 유럽이 들이민 불공정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공감했던 부분은 요즘 인류의 행동양식이나 심리상태는 들짐승을 사냥하고 야생 과일을 따먹던 우리 조상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지적이었다. 호모 사피엔스종은 지구에 나타난 이후 거의 대부분을 수렵채집하면서 살았으며, 농업혁명이 일어나 한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은 전체 기간에 비하면 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꺼운 교양서적을 읽고, 유니세프 광고를 보면서 ARS를 누르고, 좋은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지만 본능은 아직 원시인에 가깝다. 갑자기 끼어든 앞차에 스멀스멀 분노가 피어오르고, 결혼반지가 손가락에서 반짝이지만 매력적인 이성에게 시선을 뺏기고, 냉장고 속 기름지고 달콤한 열량 덩어리를 뱃속 지방으로 저장해 놓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수의사 관점에서 곱씹어 볼 사건들도 반복해서 제시된다. 예컨대 사피엔스가 이주를 시작한 아메리카나 호주 대륙에서는 여지없이 대형 포유류의 멸종이 뒤따른다. 또한 현재 당연하듯이 이뤄지고 있는 공장식 가축사육이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탐욕스러운 행동인지 여러 번 경고한다. 동물들도 사람과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연구결과를 알면서도, 인간은 기름진 식탁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대는 역사상 최초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생각을 공유하고 있고, 사람들은 이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부자나 백인 남성만의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망만을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멀지 않은 미래에 상식이 될 것이다.


인류는 커다란 세 가지 혁명을 통해서 짧은 시간 안에 빠른 속도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무형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토대로 대규모 집단을 구성할 수 있었고, 이 힘으로 경쟁자들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사피엔스는 이에 머물지 않고 문자, 화폐, 과학 등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삶을 나아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의 근원적인 동기는 인간의 이기심이었다. 옛날에는 배고픔 때문에 활과 칼로 주변 동물들을 몰살시켰고, 현대에는 피부색이나 이데올로기의 차이 때문에 기관총으로 다른 사람들을 청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도 사피엔스 종의 존속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더 잘 살고 싶다는 본능에 이끌려 이룩한 인간의 진보는 이제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기존 사피엔스보다 뛰어난 특질을 지닌 새로운 인류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되었고, 그전에라도 핵 단추는 이미 여러 사람이 만지작거리고 있다. 사피엔스의 과학과 기술은 이처럼 신의 영역을 넘보는 곳까지 도달해 있지만, 가치판단 기준은 동굴 속에서 메머드의 살을 뜯어 먹던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린아이 손에 쥐어진 총처럼, 인류는 아직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사피엔스 종 자체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태이다. 저자는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지 모두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한 권의 책에서 모두 설명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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