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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u Mo Feb 02. 2021

문제가 아닌 삶으로 접근하기

다큐멘터리 <길모퉁이가게>가 시간으로 이야기하는 법



때로는 켜켜이 쌓인 시간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고등학교나 대학에 가지 않은 비진학 청소년들이 모여 일하는 도시락 배달 가게. 이름은 <소풍가는 고양이>.


3년 전에, 어디선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관심이 생겨서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 가게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찍어두고, 당사자인 청소년들을 인터뷰해보면 이야기가 되지 않겠나 생각했다. 


이 도시락 가게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그동안 어떤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는지, 학교에 가지 않은 청소년은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 무엇이 달라지면 좋겠는지. 매력적으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풍가는 고양이>를 이끌고 있던 박진숙 대표를 찾아 연락했고, 사전 만남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었던 이야기를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 만들었던 영상들을 쭉 보니까 메시지가 뚜렷하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당사자들을 주로 인터뷰하는 것 같다고. 그런데 여기 있는 친구들은 그렇게 인터뷰하기 어려울 거라고. 


설명은 이랬다. 여기 있는 친구들 모두 정말 마음속 깊은 곳에 여러 복잡다단한 감정을 감추고 있을 텐데, 거기까지 접근할 수 있으려면 한두 번 만나서 인터뷰하는 걸로는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오해의 소지만 생길 수 있다고. 


그래서 당사자들도 딱히 인터뷰를 원치 않고, 본인도 그렇게 인터뷰에 내보내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서 당사자가 보이지 않더라도 문제를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을 한 번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지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데, 2014년부터 제작자 한 분이 3년 동안 붙어서 내내 가게의 일상을 찍었다고 했다. 제작자도 1년 정도를 옆에 찰싹 붙어서 촬영한 뒤에야 이제 좀 내용이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고, 내게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사전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 드러나지 않는 당사자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묘한 반발심이 들었던 것도 같다. 3년을 따라붙었다고 하는데 꼭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일까, 사실 이야기를 편하게 꺼낼 수 있도록 하는 조건만 현장에서 잘 만들면 어느 정도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반발심. 


결국 인터뷰는 하지 못했고,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우연히 그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소풍가는 고양이> 3년의 일상을 찍고, 또 1년 넘는 제작을 거쳐 기어코 완성된 그 다큐멘터리. 이름은 <길모퉁이가게>.


작품을 보고 난 뒤에야 <소풍가는 고양이>의 박 대표가 왜 그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작품은 말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시간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제작자는 한 번도 개입하지 않고, 그냥 3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순간순간으로 채워져 가는지만을 조용히 쌓아나갔다. 


처음에는 가게의 청소년들이 카메라를 의식하는 모습이 계속 눈에 띄었다. '카메라 없을 때, 둘만 있을 때 얘기하죠' 등의 말도 들렸다. 그러다 1년, 또 1년이 지나면서 도시락 가게의 사람들은 점점 카메라가 마치 없는 것처럼 지내기 시작한다. 출근길 버스에서 찍어도, 가게에서 싸우고 화내고 노는 모습을 찍어도, 누가 다쳐도, 아니면 집에 가는 길을 쫓아가면서 찍어도. 그런 변화는 기껏해야 하루 이틀 따라다니고, 한두 시간 인터뷰하는 내가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조용히 기다렸을지. 이야기를 만들면서 늘 어떤 걸 보여주고 어떤 걸 말해야 하는지부터 먼저 생각하는 내게 마치 그 반대도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삶으로 접근하는'.


최근 일하면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좋아하는 말인데, <길모퉁이가게>를 통해 그게 어떤 모습일지를 잠깐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그 작품처럼 몇 년간 누군가를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담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누군가의 삶을 오래오래 깊게 담아낼 수 있다면, 그러면 소원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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