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한 번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동안 만든 콘텐츠들 보면 노동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요.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얼마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우물거리면서 이전의 레퍼토리를 반복하려 했다. 아, 개인적으로는 화장품 공장에서의 아르바이트나 택배 물류창고에서의 경험이 컸는데-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다가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엄마의 일이.
엄마는 인천의 한 여자상업공고를 나왔다. 대학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던 그 당시에, 이 학교 다니던 사람들이 정말 똑똑했다고 엄마는 종종 회상한다. 졸업한 엄마는 곧 은행에 들어갔고, 거기서 지금의 아빠도 만났다. 어릴 적의 나는 엄마가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지폐를 착착 세고, 빠르게 암산을 해내고 자유자재로 주판을 쓰는 모습에 감탄하곤 했다.
IMF가 터지고 모든 것은 뒤바뀌었다. 주인을 잃은 은행은 이리 인수되었다가 저리 합병되었다가, 끝내는 사라졌다. 엄마는 부업으로 미싱을 돌렸다. 드르륵드르륵, 일정한 소리가 낮이고 밤이고 집안을 채우던 날이 꽤 길었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책을 서너 권씩, 여러 집에 배달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책을 대여해주는 사업이 조금씩 뜨기 시작할 때였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 집 낡은 승용차의 뒷좌석이나 트렁크에는 늘 다른 집에 배달해줄 책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골프장 바로 옆에 있는 용품점에서 판매직을 하기도 했다. 가끔 스포츠 뉴스에서 골프 소식이 나오면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용어를 설명해주었다. 톨게이트 수납원으로도 일했다. 3교대로 일했던 엄마는 종종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일을 나갔다. 끽해야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었을 그때는 왜 엄마가 그 시간에 나가야만 했는지 몰랐다. 엄마는 낮이고 밤이고 어느 도시와 도시 사이의 경계에서, 외딴 섬처럼 딸린 부스 안에서 돈을 받고 또 거슬러주었다. 다른 엄마들과 함께.
친구의 소개로 동네 구청에서도 일했다. 고졸에 별다른 경력도 없었지만, 이전에 은행에서 익혔던 기술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이 무렵 엄마는 종종 내게 이력서 양식을 찾아달라고 했고, 아르바이트나 채용 사이트를 계속 들어가 보곤 했다. 그러다 엄마는 카페를 차려보면 어떻겠냐고, 종종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저기 다른 카페를 다니며 알아보기 시작했고, 자리도 보러 다녔고, 박람회도 다녀오고, 학원에 다니면서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냈다. 그리고 내가 군생활의 절반을 채웠을 때쯤 엄마는 동네에 작은 카페를 차렸고, 사장님이 되었다.
사장님이라고 해서 무언가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매달 나가는 고정비는 크고 또 무서웠다. 아르바이트를 한 명 쓰다가 인건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내보냈다. 나와 동생이 가끔 나가서 커피를 내리고 설거지를 하면서 일을 도왔다. 엄마는 영업 개시부터 종료까지 매일 12시간을 카페에서 보냈다. 도저히 졸음을 참지 못할 때에는 카페 문을 잠깐 잠그고, 구석의 안 보이는 자리에서 쪽잠을 잤다. 별 볼 일 없던 골목에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엄마는 카페를 내놓았다. 그 자리에 지금 무엇이 들어와 있는지 나는 모른다.
이후에는 어느 떡볶이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 엄마는 가끔 분식 한 꾸러미를 식탁 위에 던져두었고, 나머지 식구가 그걸 나눠먹었다. 엄마는 많이 먹지 않았다. 엄마에게선 기름 냄새가 났다. 곧 엄마는 뭐라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이는 많은데 경력이 너무 없어서, 어디에서도 써주려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엄마는 간호학원에 나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새벽까지 책을 펴놓고, 쓰고 읽고 또 외웠다. 그러면서 이제 나이가 드니 외우는 게 잘 안 된다며 멋쩍게 웃었다. 요양병원에 실습도 몇 번 나갔지만, 공부에 실습에 치이면서 힘들어하던 엄마는 곧 그만두었다.
인천공항으로 나가서 비행기 내부 청소를 했다. 엄마는 가끔 비행기를 청소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내게 얘기하곤 했다. 단단한 의자나 받침대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와 있어 몸에 부딪히는 곳도 많고, 바닥의 잔해물을 치우려면 허리든 목이든 잔뜩 아래로 수그리고 청소해야 한다고. 그리고 관리자가 하도 깐깐해서 빨리빨리,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엄마는 어느 사립병원이 있는 주차장에서 주차관리를 하기도 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그날 있었던 사건을 말해주곤 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욕을 했다거나 화를 냈다거나, 돈을 던졌다거나, 별의별 일들을 겪는다고. 세상에 또라이들이 왜 이렇게 많냐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잠들기 전에, 가끔 엄마와 나는 캔맥주를 마셨다.
공인중개사 공부도 잠깐 했다. 그래도 잘하면 부동산 실장은 할 수 있지 않겠냐며. 다시 밤마다 수험서를 펴놓고 공부했고,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시력이 정말 좋았던 엄마는 어느새 안경을 쓰고 있었다. 자격증이 없어도 일은 볼 수 있다고 하는 몇몇 부동산에 나갔고, 의뢰인과 함께 집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자격증도 없이, 나이 많은 엄마가 부동산에서 오래 일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지금 다시 어느 주차장에 있다. 올해 초, 주차장 소유권자와 하청업체와의 재계약이 진행되면서 엄마는 혹 또다시 잘리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내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을 거라고, 너무 걱정 마시라고 말해주었다. 다행히 엄마는 잘리지 않았고, 주차장 요금소가 아닌 사무실로 들어가 컴퓨터로 작업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인건비 절감의 차원에서 그동안 사람이 앉아 있었던 요금소는 모두 무인정산기로 바뀌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잘렸다.
순서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고, 사이사이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쓰면서도 어릴 적의 몇몇 장면이 떠오른다. 뭔가 엄마가 그 일도 했던 것 같긴 한데, 그건 대체 얼마나 한 건지 하면서. 엄마는 IMF 터지기 전의 은행 생활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안정적인 노동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늘 어딘가의 하청 또는 재하청 업체에 속해 있었거나, 비정규직이었거나, 불안한 소규모 자영업자였다. 엄마의 일은 마치 외줄 타기처럼, 불안과 걱정과 한숨을 먹으면서 위태롭게 이어져왔다.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의 일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엄마는 한 번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우리 엄마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엄마들이, 이제는 중장년이 된 여성들이 겪었을 일들. 또는 고졸 학력자들이, 길거리의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마주했을 일들. 셀 수 없는 비정규직들이, 아르바이트들이, 갑질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이들이 경험했을 일들. 승무원, 간호사, 소방관, 보조출연자, 배달 라이더, 보육교사, 비정규직 여성 직장인들. 내가 인터뷰하면서 만난 모든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엄마의 일과 분리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 이야기에 계속 시선을 두려는 이유는 이게 전부다. 우리 엄마는 늦었지만, 그래도 엄마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존중받으면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서.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희생과 봉사를 강요받지도 않고, 나이와 학력과 성별 어느 것으로도 차별받지도 않고, 주어진 일 필요한 일에만 열중하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얼른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