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남을 허락하며 살아주세요.
어린 시절 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저는 친구들의 완벽함을 부러워하며 10대와 20대를 보냈습니다. 부러움은 곧 비교가 되었고, 비교는 지금까지도 저를 괴롭히고 있는 열등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의 저는 대인기피 증세도 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 시작된 증상이 20대 초반까지 이어져서 친구들과 마주 앉아 1분 이상 대화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대화가 시작되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어요. 사람들이 저를 멍청하고 못났다고 생각할 것만 같았거든요. 지금 저의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 태인이가 그 시절의 제 모습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네요. 여하튼, 성적표를 걱정하는 ‘하위권 학생’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인생을 알기엔 이른 10대 소녀에게 '삶'이 한동안 '포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었거든요. 서른이 넘어서야 이 이야기를 담담히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제 글을 저와 같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수없는 자책에 잠 못 이루는 스스로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 알려드리고 싶어요. 처음에는 괴로운 인정으로 시작할 거예요. 죽었다 깨어나도 나보다 나은 그들과 같아질 수는 없다는 인정이요. 이 인정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한동안은 ‘그래도 쟤보단 낫지’ 같은 위안으로 그 자책을 값싸게 메우기도 할 것입니다. 저 역시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처를 엉뚱한 타인에게 되돌려주며 버틴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당신처럼 본성이 착해빠진 인간인데,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20대 초반을 마무리하던, 전두엽이 충분히 발달한 어느 날 결심했지요. 남의 완벽을 흉내 내는 대신, 내 어설픔을 인정하고 말자, 누군가 비웃으면 그 앞에서 박수를 치며 살아가자, 하고요.
그 선택으로 살아간 지 어느덧 10년을 바라봅니다. 하루하루 성긴 못남 들을 쓸어내며 보듬어보니, 그 어설픔이 모여 고유함이 되었습니다. 이게 어떤 삶이냐면요, 누군가가 제 삶을 부러워하는 것도 같고, 안타깝다 여기는 것도 같은데, 그 아무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삶입니다. 그냥 말 그대로 '나의 삶'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다름'을 곧잘 '틀림'이라 배웠어요. 이런 우리에게 불완전한 실천이 실패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거 아무래도 틀렸습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요, 우리에게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설퍼도 꾸준하게 찍히는 점들이 생각보다 촘촘한 삶의 무엇을 만듭니다. 점이 모이면 뭐가 된다는 아무개의 진부한 말을 저는 이제야 이해하는데, 여러분은 어떤가요? 제 경험 상 그 점들 하루 이틀 10년 모이니 결국 아주 달라진 오늘을 만들더라고요. 어디서부터 얼마만큼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분명한 변화가 제게는 나타난 것을 느낍니다.
인생에 대한 방법론을 감히 설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듯한 인과를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에요.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만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각자가 비교를 거두고 자신과 닮은 좋은 점을 하나씩 찍어가기를 원합니다. 그 점들을 서로 방해하지 않고 응원하기를 원합니다. 그저 실행했던 불완전한 실천이, 당신을 결국 겸손하게 만들 것입니다. 잘한 날엔 감사를 느끼게 하고 못 한 날에는 포용을 느끼게 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그랬던 것 처럼요.
그런 저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점'들에 대해 들려드릴까 합니다. 비건의 삶을 동경했던 제가 1년 동안 육수는 먹는 채식주의자에 머물렀던 이야기, 몸짱이 되고 싶었지만 오히려 10킬로그램이 늘어난 몸을 마주했고, 그럼에도 꾸준히 운동하는 이야기, 억만 기부장자가 되고 싶었지만 '천오백만 원' 기부장자 정도는 될 수 있었던 이야기, 일 년 100권의 독서는 못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이야기, 원어민처럼 유창한 영어를 바랐지만 영어가 서툰 유학생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았던 이야기에요.
화려한 성취로 이어지지 못한 '점'들입니다. 제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어설프게 실천했던 날 들일뿐이지요. 그런데 이런 제 글들로 당신을 만든 '점'들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듬성듬성 찍어놓았던 당신 생의 소중한 점들이, 제 글을 통해 오랜만에 당신에게 관조될 수도 있겠다는 욕심이 듭니다.
저는 이렇게 어설프게 삼십 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서른의 ‘고귀한’ 앎은 또 먼 날의 어느 날 어설픈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을 알고 있습니다. 10년 뒤의 저는 이 글에 콧방귀를 뀌겠지만, 그러면서도 애씀이 묻어나는 제 생각들에 미소를 지을 것이 분명해요.
이렇듯 미래의 저와 당신처럼, 오늘의 많은 이들도 결국 당신 오늘의 날을 예쁘게 바라봐 줄 것입니다. 그러니 외부 시선 걱정일랑 말고 어설프게 용기 내는 연습을 합시다. 오늘의 어설픔이 내일의 또 다른 어설픔을 낳을지라도 그 윤회를 또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내어봅시다.
다시 첫 문장을 빌려 이야기드리자면,
스스로의 못남과 어설픔과 실패를
허락하며 살아주세요.
완벽하지 않아서 시작했고, 완벽을 바라지 않았기에 꾸준할 수 있었던 제 이야기를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