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마저 매력적인 툴리, 오로지 내게서만 구할 수 있는 공감과 위로의 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일상이 버거울 때, 위로가 필요할 때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내가 필요로 하는 공감과 위로를 얻기란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말하면 "힘내"라는 말 대신 "나도 힘들다, 알고 보면 누구나 힘들다"라는 다소 민망한 말이 돌아오거나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말에 "다 잘될 거야! 걱정 마!"라며 쳐지는 내 하소연과 우울한 분위기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좋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사실 내가 원하는 위로를 건네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
언젠가부터 '힘들다' '버겁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듯 그저 허허거리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타인에게 위로를 애원하다 더 우울해지기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내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차분하지만 진심이 있는 위로를 건네는 사람인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 툴리에 나오는 툴리는 이상적인 친구이자 공감러이다. 공감하는 척하면서 나의 불행이 타인의 불행보다 덜하다고 불행의 크기를 비교하지도, 동정을 공감으로 가장하며 타인을 기만하지도 않는다. 그저 가만히 들어주다, 무심한 듯하지만 친구의 속을 꿰뚫어 보는 응원의 말을 건넨다.
툴리가 전하는 말들은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전하는 공감과 위로의 메세지이자, 누구보다 내가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속삭여줘야 하는 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후반의 반전은 모두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특별할 것 없는 커리어, 이루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꿈과 눈 앞에 닥친 아이 셋이라는 현실, 어느 순간부터 그저 적당해진 남편과의 관계, 마를로는 입으로 꺼내지 않지만 자기 자신의 삶이 실패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마를로에게 '오히려 꿈을 이루신 거예요"라고 말하는 툴리.
예기치 못한 임신으로 회사를 휴직하게 된 친구, 그런 상황에 마음이 복잡했을 친구에게 나는 그런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도리어 친구의 화를 돋울까 싶어 "축하해 너무 좋겠다!"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그때 그 친구를 축하할 수 있는 '진심'이 있었을까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분명하다. 나는 어쩌면 임신으로 경력이 단절될 친구를 보며 친구에게 온 아이라는 축복과 새로운 삶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내가 항상 보아온,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친구 개인의 삶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공감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딸의 거짓말에 "내 인생이 빈껍데기 같다"는 어려운 고백을 꺼내놓은 SKY캐슬 노승혜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들은 같은 처지의 엄마들이다. 그들은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억지로 공감의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툴리도 결국, 가장 좋은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내가 내 자신을 북돋아주지 않는다면 그 누가 나를 위로해줄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내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보다 타인의 얄팍한 위로만을 바라 왔던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슈퍼맘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는 동시에 그 내면에는 '그만큼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을 위한 위로를 마음속에 품고 사는 이 시대 엄마들의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마를로가 아닐까.
엄마들뿐 아닐 것이다.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그러다가 또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잘 해내야 하는 걸까 조용히 내 자신에게 묻게 되고. 툴리의 말대로 '아기는 우리처럼 밤새 자라 있을 것이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또 할 수 있을 때 하면 되는 것이고'.
누구나 머리로는 알지만 조급한 마음, 답답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언젠가 친구들과 '첫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친구들은 첫째라는 이유로 더 큰 책임감을 안고 살았다고 토로했다. 뭐든 동생보다 더 잘해야 하고, 실수에 있어서도 더 크게 꾸지람을 받았던 과거의 일들, 그리고 그런 과거의 경험을 통해 성인이 된 지금도 뭐든 동생보다 더 나아야 하고 동생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무거운 의무를 짊어지고 가는 첫째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뭐든 더 관대하게 용서받으며 살아온 동생들의 태평함과 무책임함에 대해 불을 뿜어대며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보며 왜 아무도 "첫째, 둘째 상관없어. 너희들은 다 같은 어린이들이고 똑같이 잘할 때도 못할 때도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나는 꼭 그런 엄마가 되어야지 생각했다.
엄마든 아이든, 첫째든 둘째든 누구나 완벽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툴리는 크지 않은 밤의 목소리로, 그러나 활기를 잃지 않는 경쾌한 목소리로 조금만 힘을 빼보라고 말한다. 무작정 "괜찮아"라고 말하기보다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천천히 마를로의 삶에 녹아들며 건네는 호기심 어린 질문과 진실된 공감, 위로의 말들이란 마를로의 몸과 마음을 모두 감싸 안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말들이 마를로 자신이 자신에게 건네는 것들이란 걸 알게 될 때 비로소 내가 내 자신에게 건네는 애정 어린 질문과 내 내면을 쓰다듬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 나도 모르게 꽉 붙들고 있던 것들을 스르르 놓게 되는 편안함,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족을 위한 당신의 단조로운 일상은, 모두에게 소중한 선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