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 그 사이에 서있는 누구나를 보여주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나는 영화 포스터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의미로 책의 표지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영화의 핵심을 담고자,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뽐내고자, 잠재적 관객들의 마음을 얻고자. 여러 고심 끝에 영화 포스터를 디자인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포스터는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확실히 성공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 디자인적으로는 깔끔히 정돈되었지만 어딘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이 영화의 한국판 포스터에 매료되었고 여러 나라, 다양한 버전의 포스터를 보면서 '이 영화 뭔지 몰라도 봐야겠다' 생각하게 되었다. 호불호가 갈리는 감독 테리 길리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영화 개봉까지 30년이 걸렸다는 우여곡절 제작 스토리가 이 영화를 꼭 보고 싶다는 동기 부여로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상상을 자극하는 포스터와 종잡을 수 없는 시놉시스, 시각적으로 이미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틸컷만 보고 나는 이 영화를 선택했다.
현실과 꿈, 이상과 환상
다양하게 변주된 포스터에서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가는, 혹은 우연과 착각이 버무려진 사건들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변화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 둘, 돈키호테를 졸업작품으로 만들었던 현재의 광고 감독 토비와 토비의 졸업 작품에서 돈키호테를 연기하다가 자신이 진짜 돈키호테라 믿게 된 구두 수선공 하비에르의 관계와 두 인물의 변화를 유심히 보다 보면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내 경우에 시각적인 독특함에 이끌려 이 영화를 보게 되었지만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인물들의 서사와 변화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 전반적인 시각적 독특함은 영화를 보기 전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강렬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두 명의 '돈키호테', 혹은 '돈키호테'가 되어버린 두 사람의 여정을 지켜보다 보면 같은 상황을 겪는 두 사람의 눈에 비치는 현실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돈키호테 원작에서 돈키호테가 풍차를 보고 거인이라 생각하듯이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하비에르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대하고 토비는 점차적으로 혼란을 겪게 된다. 현실과 꿈, 현실과 이상 사이에 무기력해 있던 토비는 추억 속에 남겨져있던 하비에르를 만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으며 때로는 분노, 때로는 포기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새로운 돈키호테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이런 과정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인 나조차 혼란을 겪었다. 처음에는 하비에르를 그저 '미친 할아범' 정도로 바라보다가 그가 그렇게 '미쳐버린' 것이 '영혼을 담아 돈키호테가 되어보라'는 토비의 이야기에 어떠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되고, 또 졸업 작품 촬영이 끝나고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하비에르의 삶에서 어떠한 '진정성'마저 느끼고 말았다.
토비의 현실 복귀가 아닌 환상 속에 잔류라는 영화의 결말에는 그만큼 큰 의미가 담겨있지 않나 싶다. 과거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현실에서 가진 것을 놓고 싶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열정을 그리워하는, 토비라는 인물이 바로 '돈키호테' 그 자체가 아닐까. 원작의 돈키호테처럼 자신이 공주를 구하는 돈키호테가 아닌 신발 수선공 하비에르 임을 자각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하비에르의 모습에서 어떠한 서글픔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허무함이 느껴지지는 않듯이.
두 명의 돈키호테, 현실과 이상(환상)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갈 새로운 돈키호테 토비를 보며 어쩐지 짜릿함을 느끼고 말았다.
현실의 돈키호테들에게
돈키호테 작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어렴풋이 내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돈키호테란 작품의 전개와 결말이 어떠했지... 궁금해졌다. 나처럼 돈키호테를 문학작품으로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돈키호테 원작의 내용을 전하자면,
17세기경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에 사는 한 신사가 한창 유행하던 기사 이야기를 너무 탐독한 나머지 정신 이상을 일으켜 자기 스스로 돈 키호테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 마을에 사는 뚱보로서 머리는 약간 둔한 편이지만 수지타산에는 빠른 소작인 산초 판사를 시종으로 데리고 무사(武士) 수업에 나아가 여러 가지 모험을 겪게 되는 이야기.
돈 키호테는 환상과 현실이 뒤죽박죽이 되어 기상천외한 사건을 여러 가지로 불러일으킨다. 사랑하는 말 로시난데를 타고 길을 가던 돈 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이라 생각하여, 산초가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습격해 들어간다. 그 결과 말과 더불어 풍차의 날개에 떠받쳐 멀리 날아가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돈 키호테는, 이것은 마술사 플레톤이 거인을 풍차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 키호테는 모레나 산에 들어가 산초에게 둘시네 공주를 찾아가 자기의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한다. 둘시네 공주란 돈 키호테가 잠시도 잊은 적이 없는 가상의 공주였다. 그 명령을 받은 산초는 돈 키호테의 편지를 가지고 둘시네 공주를 찾아갔다. 그리고 산초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 가상의 공주란 여자가 보통 남자 이상의 여장부일 줄이야.
이러한 무사 수업 도중에 산초는 끝내 자기 희망이 실현되어 바라타리아 섬의 지배자가 된다. 산초는 그 섬을 양식(良識)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돈 키호테는 계속 무사 순례의 길을 중단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그의 친구 카라스코가 기사로 변장하여 돈 키호테에게 도전한다. 그리고 돈 키호테를 굴복시켜 앞으로 1년 동안 무기를 쥐지 않겠다고 약속을 시켰다. 우울해진 돈 키호테는 병석에 눕게 되지만 결국에는 이성을 되찾게 된다. 그는 자기의 과거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친구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골고루 분배해 준 뒤 경건한 기분으로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은 정편(正篇) 52장, 속편 74장으로 되어 있다. 〈돈 키호테〉는 사람들로부터 "인간의 서"라 일컬어지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 개의 경향, 즉 이상적인 일면과 현실적인 일면을 두 사람의 작중 인물을 통하여 멋지게 표현했다. 작자는 전쟁에 참가하여 왼쪽 팔을 잃었고, 귀국 도중 해적의 포로가 되어 5년간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돈 키호테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002. 4. 1., 김희보)
돈키호테 원작의 내용을 알고 나니 내가 느낀 짜릿함의 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이상적인 면과 현실적인 면을 모두 녹여낸 원작의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어쩌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본능과 겉으로 내보이는 정제된 모습, 또는 이성적으로 발을 붙이는 있는 각자의 현실과 머릿속에 떠다니는 이상의 세계, 그 두 가지에 대해 모두 풀어내 보고자 했던 아주 복합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원작의 이야기를 두 명의 돈키호테를 통해 풀어내고자 한 테리 길리엄 감독의 의도가 누구에게나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 명의 관객, 내게는 확실히 아주 작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