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시간이 날 때 이런 리스트를 적어보면, 생각보다 행복해지는 게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의 커피. 세상의 전원이 켜지기 전 깊고 충만한 내 시간을 갖는 일.
눈에는 파랑을 담으며 햇볕에 살짝 달궈진 모래사장을 걷는 일, 짠냄새가 섞인 신선한 바닷바람, 투명한 파랑과 초록이 오묘하게 뒤섞인 날 좋은 날의 바다로 꽉 차 있는 유리창, 바다마을의 작은 서점에서 고른 책 한 권을 바다 한 번 단어 하나 번갈아 눈에 새기며 천천히 읽는 일.
낯선 동네를 탐험하는 목적없는 산책: 그 동네는 매력적인 작은 카페와 책방, 소품샵이 군데군데 뒤섞인 오래된 다세대 주택가여야 하고, 적당히 무심한 시선으로 낯선 이의 침입을 모른 체 하는 산책자들이 군데 군데 있어야 한다.
산책 중 마주친 심장이 졸아들 정도로 귀여운 강아지: 주로 주인에게 무언가 주장하고 있는 녀석들이 귀엽다. 더 못걷겠으니 안아달라던가, 산책을 계속 하자든가. 뻔뻔한 녀석들의 얼굴과 주인들의 난감한 기색이 귀여움 증폭에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품종견이고 새끼여서 귀여운 것 말고, 주인과 개 사이의 깊은 신뢰가 느껴져서 서로 좀 뻔뻔해질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귀여움이 있다.
우연히 들어간 예쁜 책방에서 책방 주인에게 장미 한 송이를 받는 일: 우연히 들른 프로스트의 책방에서 가게를 찾은 손님들에게 사장님이 장미꽃을 나눠준 일이 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꽃을 받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지만, 그 날은 정말 예상 밖에 꽃을 갖게 되어서 너무나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완벽하게 세팅된 손톱과 발톱을 멍하니 보는 일: 네일아트는 돈이 아까워 거의 안받지만 작년에는 가성비 좋은 젤네일 스티커에 빠져 여름 내내 화려한 손톱 발톱을 갖고 있었다. 올해에는 귀찮아서 발톱에만 겨우 젤네일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상태다. 손 발톱을 꾸미는 일은 내게 최고의 사치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어린 시절 애거서 크리스티의 어느 책에서 본 살해당한 귀부인에 대한 묘사 때문인 것 같다. 그 귀부인이 하루종일 스스로 하는 일이라고는 제 손톱을 예쁘게 다듬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를 옹호하는 편이다. 손톱과 발톱은 스스로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조그마한 것이다. 몸에 지닐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아름다움.
날 좋은 날, 아무도 내게 관심 주지 않는 조용한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실컷 고르는 일: 도서관에는 막 출간된 신간들도 없고, 인기 있는 책들은 이미 대출중이거나 너무 낡아 손대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있다는 큰 단점이 있지만, 눈치보지 않고 책을 고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도서관에서는 주로 삶을 돌보는 일에 대한 에세이나 실용서, 요리책, 궁금하긴 한데 너무 노골적이고 낯부끄러워 차마 내 책장에는 꽂아두기 싫은 자기계발서들을 빌린다. 혹은 괜찮을 것 같은데 확신은 가지 않는 작가들의 소설들을 마구 빌려보고 내 취향의 작가를 찾아낼 수도 있다.
막 배송된 책 상자를 뜯는 일: 새 옷이나 식료품 구매한 걸 뜯는 일은 별로 기쁘지 않다. 살 때만 즐겁고, 그걸 뜯어서 정리할 땐 이미 숙제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박스에서 꺼내어 만져보고 냄새맡고 책장을 넘겨볼 때 나는 최고의 쾌락을 느낀다. 그렇게 산 대부분의 책들은 중고로 처분하거나 도서관에 기부해서, 집에는 책꽂이 하나도 다 못채울 만큼의 적은 양의 책들만 남아있지만 말이다. 물론 처분한 책이 그리워서 다시 빌려보는 헛짓거리를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