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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사비맛 찹쌀떡 Dec 31. 2023

파도 위에 올라타는 자

2024년 시대 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읽고 나서

2023년, 경력 이직에 성공했고 완전히 새로운 조직 문화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한 해였다.


그 조직은 몇 달 전부터 다양성에 대해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국적과 언어가 다르니 다양하다’는 논제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모였고, 그렇다면 우리가 정의하고자 하는 다양성은 과연 무엇인가, 탐구하기 위한 TF가 만들어졌다.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며 어젠다를 뾰족이 다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속한 팀이 소위 ‘가장 다양성이 큰’ 팀이었다. 모두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는 팀이라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다양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이 곧잘 들어왔다. 어쩌면 나의 대답은 원하는 답안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는 ‘다양성의 논의가 왜 국적과 언어에 대해서 이뤄지고 있느냐. 나는 내 팀이 다양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거주국, 국적, 언어에 상관없이 나에게 그들은 한 명의 개인일 뿐, 한국인 팀원과 일하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국적과 언어라는 틀을 제거한 다양성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우리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이 다양성이 있는 조직이라 생각한다. 사고의 확장이 다양할 수 있는 업무 환경. 그렇게 발전된 내 생각을 공유하는데 지체가 없는 곳. 생각과 관점의 차이가 존중받는 곳이야 말로 다양성 있는 조직이지 않을까? 물론 국적과 문화와 언어적 배경이 다양하다면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직 내에서 다양한 생각의 범위를 수용하는 크기의 그릇을 가지는 것이다. 단순히 장애인 직원, 외국인 직원이 있다는 것이 다양성의 지표가 될 수 없다.


2023년 12월 마지막 독서로 송길영 작가의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읽었다. 송길영 작가도 “형평성이 보장된 곳에서 안정성을 느낄 수 있다. 다양성은 그 안정성, ‘괜찮다’는 보장된 심리가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 (61쪽)”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다양성에 대해 거시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나름 ‘늦은’ 나이까지 사회적 기준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다니며 한국과 해외를 돌아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30대가 넘어서 간 석사 유학은 ‘비정상’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누군가의 눈에는 40이 가까운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은 ‘결점’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살아있고 변화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었다. 업을 옮기고 터를 바꾸더라도 빨리 습득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그걸 보여주는 경력이, 박사 학위 한 장보다 나에겐 의미가 있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로서 우리는 변화를 살아내고 있다. 삐삐와 핸드폰을 둘 다 사용한 우리, 국민학교와 초등학교를 둘 다 다닌 우리, 서태지와 뉴진스를 모두 본 우리, 전원일기와 오징어게임을 둘 다 알고 있는 우리, 플로피디스크에서 AI까지 모든 기술의 변화가 우리 손을 거쳐 갔다. 


부모님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 부모님들이라면 충분히 안정적인 월급과 튀지 않는 규범에 따라 살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가 삶을 관통하고 있는 지금, 관습대로 사는 것이 과연 안정이라고 할 수 있나? 


나와 3살 터울의 사촌 언니는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그때만 해도 여자는 건축학과에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일용직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남성이기 때문에, 여자가 건축 현장에 가면 고생만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사실 본인도 큰 고민 없이 수능 성적에 맞춰 건축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던 것이었다. 졸업해도 버릴 수 있는 공부였고,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그 당시만 해도 전공과 상관없는 곳으로 취업하곤 했다. 그땐 그게 ‘정상’이었다. 


고작 10여 년이 지났을 뿐이다. 똑같이 찍어낸 아파트보다 개성이 담긴 건축물과 공간의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진 시대가 된 지금, 건축가는 새로운 전문직이 되었다. 누군가 건축학과를 지망한다고 할 때, 요즘 사회의 반응은 어떠할지 흥미로운 비교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


미용을 하고 싶어 했던 사촌 동생이 있었다. 남자가 무슨 미용이냐, 는 소리를 어른들에게 듣고 자랐다. ‘그런가…’ 싶었던 사촌은 미용이 아닌 일본어를 배웠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 했기 때문에 결국 일본어과를 졸업한 그 아이의 지난 10년은 어땠을까? 미용에 대한 미련이 정말 없었을까? 오히려 미용이야 말로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기술이자 또 하나의 전문직으로서 가치가 높아지지 않았나 싶다.


세상이 변화고 개인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 변화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회사의 시스템이, 국가 인프라 시스템이, 교육 시스템이 여전히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안타까운 현상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다양함을 <연결>해 내야 하는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지금부터 앞으로는 기후변화, 출산율 감소, 인공지능 기술 등장과 같은 외부적 리스크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안정적인 현상 유지보다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필요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2024년 변화를 위한 첫 번째 훈련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모습에 질문을 던져보자. 

두 번째,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찾아보자.

그동안 다수(majority)라는 집단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조금 안일해도 괜찮았다면, 개인으로서 정말 최선을 다 해보는 경험을 하는 세 번째 훈련까지 해 보자.


“지금까지 많은 개인들은 자신만의 트랙을 설계하고 독립된 목표를 설정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조직의 안정성이 나의 미래를 담보하고 그 안에서 나의 성장을 위한 단계별 기준을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333쪽 인용)


2023년이 쉽지 않은 해였다면, 2024년도 더욱 예측이 어려운 해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파도가 치지 않는 곳만 찾아다니며 불안한 안정을 고수할 것인가, 차라리 파도 위에 올라탈 것인가.

언젠가는 파도의 물결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위험해 보일지라도, 결국 빨리 파도를 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4년은 웃고 감사하며 파도를 올라타는 과정이 되길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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