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시대의 기록
1. 안네의 기록
숙제를 하던 아라는 곧바로 잠들었다. 아직 해가 떠있는 저녁이긴 했지만 집은 잠을 위한 공간이니까 언제 자든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잠 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이 시작됐다. 아라는 꿈속에서도 숙제를 했다. 주제부터 어려워 보였다. 일상에서 일생으로. 일기나 사진첩을 뒤져서 자기만의 역사책을 만들어 보라는 숙제였는데 집에 와보니 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요즘 아라 또래의 애들 중 몇 명이 실제 사진을 모아둔 앨범을 갖고 있으며 몇 명이나 일기를 쓰고 있단 말인가. 각종 SNS 앱에 올리면 모를까. 그나마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은 손쉽게 자료를 모을 수 있겠지만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아라는 할머니방 벽 위에 걸린 돌사진이 전부니 시작부터 막막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압박감이 바로 꿈에 반영되었다.
어딘가를 향해 정처없이 떠돌고 있는 아라. 안개 속을 거닐다가 점차 뚜렷해지는 사람 형상을 만났다. 사람 맞나? 귀신인가? 점점 가까워지네?
- 안녕, 아라!
- 응?
-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안네야.
처음 만난 소녀였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눈가는 어둡지만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 안네는 곧장 아라 옆으로 다가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유명인을 직접 만나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 아라는 어디 가는 길이었어?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라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안네를 바라봤다.
- 모르겠어. 어딘가로 가야 하는데 목적지를 모르겠어. 내가 어디부터 걸어왔더라.
아라는 만화속 주인공들처럼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 함께 걸어도 될까? 나도 산책을 하고 있었거든.
아라와 안네는 딱 손 뻗으면 닿을 만큼의 거리만을 눈으로 확인하며 안개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갔다. 각자 발 앞 확인하기도 바쁜 상황에서 안네는 아라에게 말을 걸었다.
- 걱정 있니?.
- 응, 학교 숙제 때문에. 내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 역사책을 만들어 보라는데 내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모아둔 게 별로 없거든. 이럴 때는 자주 놀러가고 매년 생일 파티를 연 친구들이 부러워. 넌…. 일기라도 열심히 썼지 난 일기 같은 건 숙제 때문에 쓴 거 말곤 없어. 선생님은 왜 이런 숙제를 내준 거야. 어린 애들이랑 역사가 어울리기나 하냐고.
- 너도 내 일기를 읽었구나?
- 미안. 숙제라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너 글 잘 쓰더라. 나라도 시대도 다르지만 같은 십대 소녀로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어. 맞다. 한국에선 너 말고도 전 국민에게 일기장을 보여준 사람이 또 있다.
-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어?
- 응. 이순신 장군이라고. 몇백년 전 조선이란 나라의 장군이었는데 전쟁 중에도 꼼꼼히 일기를 썼거든. 덕분에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 일기장을 읽고야 말았지.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하긴 해. 남의 일기를 보는 건 잘못이라고 하면서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애들 일기를 읽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잖아.
- 맞아. 나도 작가로 활동하는 게 막연한 꿈이긴 했지만 일기장으로 유명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니까. 보여주고 싶지 앉은 이야기도 많은데. 이렇게 전 세계 사람들이 읽을 줄 알았으면 좀 더 멋지게 썼을 텐데. 아쉽다.
두 소녀는 처음과 다르게 안개를 걸으면서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만난 지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친구가 된 듯 했다.
2. 기록되지 않는 기록
- 요즘 애들은 일기를 안 쓴다고?
안네가 신기하다는 듯 아라에게 물었다. 아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꼭 안 쓴다는 건 아니고 예전보다 덜 쓴다는 거지. 예전엔 혼자만 알고 간직하던 비밀이 많았다면 이젠 조그만 일만 생겨도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랑하는 게 더 중요해져서 일기장에만 숨겨놓는 일은 사라지고 있어.
- 신기하네. 살다보면 남한테 알리기는 싫지만 잊기는 싫은 일도 있는 법인데. 그래서 일기가 존재하는 거고.
- 맞아.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잖아. 기록하지 않으면 잊을 수밖에 없어. 사람도 그렇고 사회 공동체도 그렇고. 굳이 보여주진 않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적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중에 돌이켜보며 실수를 깨닫는 공부를 할 수도 있고. 그런데 요즘엔 굳이 기록을 남겨야 하는지 의문스러운 것들도 많이 기록되고 있어.
- 어떤 것들이 그래?
- 일반들도 어디에 갔다, 뭘 먹었다, 누구랑 갔다 같은 걸 인터넷에 꼬박꼬박 올리고 있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에 올린다는 게 좀 웃기지 않아?
- 그럼 기록을 남겨야 하는 건 어떤 사람들일까.
- 정치인이나 유명한 사람들, 학자 같은 사람들이야 기록을 남겨야지. 그래야 후대에서 그걸 보고 좋은 건 따라하고 나쁜 건 반복하지 않을 수 있거든. 그런 중요한 일은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 돼.
- 그럼 세월이 지나서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잊혀져도 괜찮은 거야?
- 어? 잊혀져도 되는 건 아니지만 뭘 먹고 뭘 입는 것까지 기록에 남길 필요가 있어?
- 난 인류의 모든 것이 역사라고 생각해. 시대별로 지역별로 사람들이 무얼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거든. 꼭 국가 간의 외교나 전쟁, 정치나 정책 같은 큰 이야기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역사라고 보기 때문에 기록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야. 만약 권력을 쥐고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기록만 남아 역사가 된다면 먼 훗날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아예 없었던 걸로 취급당할 것 같거든. 패전국 백성들의 이야기나 문화도 기억해야 하고 왕족이 아닌 평민들이 먹고 마시고 입고 눕던 모든 것도 기억되어야 한다고 봐. ’승자의 역사’보다는 ‘모든 이의 역사’가 우리의 삶과 인류의 발자취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근데 너 말 되게 잘 한다. 너랑 계속 이야기하고 있으면 똑똑해질 것 같아.
아라는 안네에게 해온 언니의 느낌을 받았다. 논리적이고 평소에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알려주는 사람. 둘은 한참동안 역사와 기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정처 없는 산책을 이어갔다. 한참 대화가 이어지던 중 아라가 심각한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 그런데 이런 건 있을 것 같아. 지우고 싶은 기록들, 예를 들어 개인적 차원에서 잊고 싶고 감추고 싶은 기억도 있는데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생활까지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하고 공유하는 건 맞는 일일까? 좋은 것만 기록해도 모자랄 판에.
안네는 곰곰이 생각했다. 인터넷과 SNS 같은 기술을 직접 쓰진 않았지만 여러 경로로 지상의 일을 쉬지 않고 공부하고 있었고, 아까 아라가 보여준 스마트폰을 만져보니 신기하긴 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기술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상식선에서도 고민해 볼 여지가 있을 것 같았다.
- 잠깐 스마트폰 좀 빌려줄래?
안네는 아라의 스마트폰을 빌려 뭔가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라는 화면을 보며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안네도 한글을 사용할 줄 아네? 독일인 아니었나?’
- 찾아보니 ‘잊힐 권리’라는 게 있다고 하네. 개인 사생활과 관련되어 있는 정보 중 공유되길 원하지 않는 데이터는 자신이든 타인이든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당사자의 필요나 요구에 의해 삭제될 수도 있다고. 활동 흔적 같은 빅데이터 정보들도 포함해서.
- 응. 하지만 잊힐 권리는 표현의 자유나 인류를 위한 공적 기록의 필요성과도 연계되어 있어서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야. 게다가 이미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은 엄청난 규모의 저장 공간에 인류의 모든 기록을 수시로 저장하고 있어서 지우고 싶어도 쉽게 지우지 못해. 그래서 더 문제지. 내 정보는 내 소유물인데 내 맘대로 지우지도 못하는 현실. 이런 상황에서 기록의 중요성만 강조하면 분명히 상처받고 피해보는 사람도 생길 거야.
아라가 한탄하듯 여러 가지 걱정을 내뱉는 사이 안네는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 디지털 장의사라는 것도 있구나. 의뢰인이 원하지 않은 데이터를 대신 지워주는 직업. 그런데 이 사람들은 또 어떻게 믿지? 지우는 과정에서 습득한 정보를 갖고 협박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음... 스냅챗이나 몇몇 메신저 프로그램에선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으면 바로 사라지는 자동 폭파 기능을 제공하고 있구나. 확실히 최근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자기 정보가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네.
시험공부라도 하듯 눈 빠지게 화면을 들여다보던 안네는 아라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 네가 사는 시대엔 모든 것이 인터넷에 업로드 되는구나. 모든 것이 기록되고. 어쩐지 디지털로 변환하지 않고 업로드하지 않으면 기억되지도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도 든다.
- 비슷한 개념으로 디지털 치매라는 말도 있어. 기기에 저장된 데이터에 의존하다 보니까 뇌에 기억하는 습관도 함께 사라지는 현상.
두 십대 소녀는 디지털 치매가 인류의 퇴화냐 새로운 신체 기관을 도입하면서 생긴 진화냐로 논쟁을 이어갔다.
3. 기억과 기록
만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인류의 진화 논쟁에서 시작해 아이돌 가수까지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는 한참 만에 기록에 대한 처음 주제로 돌아왔다.
- 요즘엔 너무 많은 데이터가 생성되기 때문에 기록을 하려면 신경 쓸 것도 많겠다.
- 응, 그럴 것 같아. 무작정 모으기만 한다고 가치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단순한 정보가 유용한 지식이 되려면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관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면 좋을까?
- 일단 분류를 잘 해야 할 것 같아. 잘 마른 세탁물을 서랍에 넣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형태의 자료인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자료인지 등에 따라 구분하면 좋을 것 같아.
- 그렇겠다. 자료를 생산하거나 분류하지 않은 사람도 나중에 필요하면 바로 찾아볼 수 있게 이름표도 붙여주고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대충이라도 검색어를 적어주면 모든 자료를 뒤져보지 않아도 되겠지. 결국 데이터 수집이나 기록물도 어떻게든 활용하기 위한 거니까. 맞다. 나랑 친한 언니가 음악 파일 설명해주면서 그런 걸 메타 데이터라고 부른다고 알려줬어. 노래 한 곡 파일에도 다양한 메타 데이터가 들어가 있다고. 제목, 가수, 작곡가, 작사가, 음반 제작사, 제작시기, 장르, 재생시간, 앨범명, 트랙번호, 앨범 자켓, 음악 빠르기, 재생 회수, 가사 등. 나중에 원하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거기에 포함되는 곡만 골라 들을 수 있으니까 편리하다고 했어.
- 음악을 파일로 들어? 전축에서 LP판으로 듣는 게 아니고?
- 맙소사. 너 완전 할머니 세대구나.
아라는 안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음악 감상 방법의 변화를 시대별 기술별로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이어졌다.
- 예전에 궁궐에서 일하던 사관들은 왕의 실수뿐만 아니라 기록하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했대. 대단하지?
- 그들에게 기록은 성스러운 의무였던 것 같아. 하긴 권력자가 원하는 말만 적으면 그런 기록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 맞아. 기록하는 사람이나 기록물을 분류하는 사람이 임의로 기록물을 선택하고 배제하면 그 자체가 권력으로 작동하겠지.
- 역시 기록물 관리는 아무나 하면 안 돼. 특히 권력층과는 거리를 두고 활동하지 않으면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어. 내가 세계 2차 대전 시기에 좀 겪어 봤잖니. 독일 나치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기록하고, 기록했던 사실조차 나중에 변조하고. 결국 나치가 원하는 목적대로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데 기록물을 사용하는 걸 똑똑히 봤어.
- 그저 기록물을 관리하는 사람을 잘 뽑는 걸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 걸.
- 그렇겠지. 기록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도 어느 정도 성숙한 수준에서 일치되어야 할 거고, 기록자를 감시하고 기록물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모든 과정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
- 예전에 학교신문 만드느라 학교 창고에 가서 선배들의 졸업앨범을 찾았는데 적지 않은 앨범이 사라지거나 훼손되어 있었어. 찢어지고 곰팡이 피고 먼지에 덮여 있고. 고작 만들어진 지 30년 된 학교에서도 이런데 그 이상의 자료들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을까 걱정되더라.
- 아직까지 사람들은 기록물 관리를 돈만 먹는 하마라고 생각해서 그럴 거야. 당장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진 않거든. 그래서 기록물에도 유통기한을 부여하더라고. 어떤 자료는 몇 년 보관하고 어떤 자료는 좀 더 오래 보관하지만 꽤 많은 자료는 의무 보유 기한만 지나면 폐기한다고 하더라.
- 그건 좀 어이가 없다. 보관하기 위한 공간과 비용이 많이 들던 예전이면 모를까 요즘처럼 디지털 자료로 변환하면 관리하기도 쉬워졌는데도 그럴까?
-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어. 어떤 자료는 시간이 지나면 쓸모가 없어지나 보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기록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폐기한다는데 네가 사는 세상에선 모든 걸 디지털화 하니까 앞으론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근데 디지털 시대고 기록물의 내용이 중요하다 해도 실물 형태의 자료를 보관하는 걸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아. 모니터로 글자와 사진만 보는 것과 직접 만져보는 건 전혀 다른 체험이니까. 결국 공간과 비용은 더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겠다.
안개가 사라지자 주변 절벽이 드러났다. 그랜드캐년처럼 수 만년의 세월이 느껴지는 단층대도 보였다. 두 사람은 긴 대화로 좀 지친 듯 보였다.
- 내가 의미 없이 생산한 데이터도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일까?
- 그럼. 심지어는 잊힐 권리를 사용해서 없애고 싶은 기억조차 누군가에겐 유용한 정보가 될 수도 있겠지. 윤리적인 가치 판단을 지운다면 모든 데이터는 의미가 있을 거야. 나 같은 이름 모를 여자 아이의 일기장이 한 시대를 보여주듯 네가 찍은 사진 하나 동영상 하나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발견할 수도 있는 거니까.
아라는 우두커니 단층대를 바라봤다. ‘난 지금껏 무엇을 남겼고 앞으로 무엇을 남기게 될까.’
- 나이테가 성장의 기록인 것처럼, 뭔가를 남기고 기록하는 건 시간에 대한 의무 같아. 설사 내가 남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기록물에 내가, 나의 생각이, 나의 행동의 결과물이 담기는 것까지 떠올려보면, 살아가면서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어.
- 그렇겠지. 내가 일기를 쓴 것도 뚜렷한 목적을 갖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결국 인류는 누구나 기록을 하며 존재할 운명인가 봐.
맑은 하늘이 보였다. 지구가 생긴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이 하늘 아래서 살아갔을까. 그리고 그중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갔을까.
아라는 안네를 만나기 잘 했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4. 기록 이후
아라는 사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전히 해는 하늘에 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잠 든지 고작 30분쯤 지났을까. 할머니와 해온은 아라가 잠에서 깰까 봐 숨죽여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라는 다시 잠들어보려 했지만 꿈속에서 장시간 대담을 나눠서인지 더 이상 눈 감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밥을 먹고 씻고 늘 하던 것처럼 아라는 해온 언니의 방에 들어갔다.
- 언니는 기록 많이 남겨? SNS 같은 곳에 포스트 많이 올려?
- 뜬금없이 왜 궁금하실까?
아라는 해온에게 학교 숙제와 안네와 나눈 대화를 설명했다. 늘 그렇듯 해온은 할 일이 많으면서도 아라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 난 SNS 같은 거 안 해. 다른 친구들이 뭐하고 사나 궁금해서 계정은 만들어놨지만 과제를 위한 자료 스크랩용으로만 쓰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올리지 않아. 굳이 내 삶을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지는 않거든.
아라는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해온 언니가 다른 사람 이름의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SNS 페이지에 글을 남겼던 것을. 이효정이었나. 아라는 그때 기억을 떠올리느라 인상을 찌푸렸는데 해온은 아라가 숙제 때문에 고민이 깊어 인상을 쓴 걸로 생각했다.
- 아라는 사진이나 일기가 많이 없어서 고민이구나. 근데 사진이나 일기장 같은 것만 기록물은 아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온에게 다가간 아라는 늘 그렇듯 언니가 문제를 해결해 줄 거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 문화재에는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가 있지? 기록물도 마찬가지야. 서류 형태의 공적 기록문서나 미술관과 박물관에 자리 잡은 작품들도 역사를 담고 있는 기록물이지만 누군가의 기억도 기록물이야.
- 기억? 기억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거잖아. 그게 어떻게 기록물이야? 기억하고 있는 사람 말곤 그걸 확인할 수가 없잖아. 게다가 그 사람이 죽으면 함께 사라지는 거잖아.
- 그렇지. 그래서 요즘엔 그런 무형의 기록물을 유형의 기록물로 바꾸는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어. 구술이 가장 널리 이뤄지고 있는 방법이지.
- 구슬? 둥근 돌맹이?
- 아니, 구술. 말로 설명한다는 뜻이야. 가령 나이가 많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의 경우, 당사자가 직접 문서로 기록을 정리하긴 쉽지 않으니까 말로 설명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대신 받아 적는 거지. 요즘엔 녹음을 하거나 동영상으로 기록하기도 해. 글로 담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와 감정을 담을 수도 있으니까. 외국의 스토리콥스 storycorps 사례나 서울시의 소리 채집 프로젝트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는 사업들이야. 이 방식의 특징은 글로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나 권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도 유용하다는 거야.
- 근데 사람의 기억이란 게 오류가 있기도 하잖아. 나만 해도 어제 그제 뭐 먹었는지는 기억해도 작년 오늘 뭘 하고 놀았는 지는 전혀 기억이 없는 걸?
- 그렇지. 그런 한계가 있긴 한데 그건 기존 방식의 기록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기록물에서도 늘상 일어나는 일이야. 흐릿한 숫자나 문자 하나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완전히 달라지는 일은 역사학계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거든. 이야기 구술 채집의 핵심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가치 있는 정보는 존재하고, 설사 정리되지 않은 목소리라 하더라도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점이야. 꼭 공적 기록물이나 권력자의 기록물이 아니라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을 보는 시각을, 더 나아가 역사를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꿀 수 있거든.
- 맞아. 꿈에서 만난 안네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해온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라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라는 꿈에서 만난 안네가 혹시 해온 언니의 분신은 아니었을까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 그럼 이제 숙제를 시작할 수 있겠지?
- 숙제? 난 자료가 아무 것도 없는데?
- 야, 지금까지 내 얘기를 들은 거 맞냐? 잘 생각해봐. 너의 인생을 가장 잘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해온은 사람,이란 말에 유독 힘을 주어 발음했다.
- 사람? 사람…. 사람!
아라는 사람이란 낱말을 몇 번 되뇌더니 욕조에 앉아있던 아르키메데스처럼 거실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소리를 쳤다.
- 할머니!
5. 새로운 시대의 기록
아라의 과제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중요한 사건별로 사진을 정리해서 사진책 형태로 들고 오거나, 파워포인트에 일기장, 사진, 여행 동영상 등을 넣어 대학생 발표수업 못지않은 완성도로 자신의 일생을 발표했지만, 아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과제를 제출했다. 이런 식이었다.
‘할머니, 나 태어날 때 모습은 어땠어?’
‘응. 아라 넌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요란했어.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엄마나 의사 모두 어디 아픈 거 아닌가 걱정했다고 하더라고.’
‘내 첫 걸음마 같은 거 기억하는 거 있어?’
‘그때 할머니는 아라랑 같이 살지 않아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너희 엄마 아빠는 아라가 두 발로 걷는 거나 말하는 거, 이가 나는 거 다 봤지. 어릴 때부터 아라 너는...’
아라와 할머니의 동영상 인터뷰. 말이 너무 길어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아라는 주제를 바꿔 질문을 던졌지만 할머니는 그때마다 그에 맞는 대답을 척척 해주었다. 해온이 적절하게 영상을 편집해줘서 다행이지 처음 인터뷰한 그대로 틀었으면 한 시간도 넘었을 게 분명했다.
반 친구들은 아라의 발표 영상을 보며 웃기도 하고 지루해하기도 했지만 담임선생님은 무척 감명 깊었다고 말했다. 아라의 가정 형편을 잘 알아서인지 선생님은 영상 재생이 끝나고 긴장한 채로 서 있던 아라에게 다가가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로 등을 토닥여주었다.
- 잘했다.
발표가 모두 끝난 후 다음 교시에는 기록관리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아키비스트가 들어와서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듣는 용어가 많긴 했지만 아라는 이미 안네와 해온 언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터라 그리 생소하진 않았다.
- 요즘엔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어요. 여러분들, 지도앱으로 로드뷰, 스트리트뷰 이용해 본 적 있어요? 거기에 나오는 거리의 모습은 매년 바뀌고 있어요. 매년 새로 사진을 찍는 거죠. 그걸 이용하면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어요. 한 십년 전 사진을 클릭해 보면 아마 여러분이 유모차에 타고 집 앞에서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웹사이트는 어떨까요. 여러분이 잘 아는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 사이트는 요즘에는 멋있게 잘 정리되어 있죠? 처음 서비스가 시작되었을 당시에도 그랬을까요? 이 사진에서 보듯 아주 조잡했어요. 초보 웹디자이너가 만든 것처럼 디자인이 썰렁하죠.
딱딱한 기록학 이야기를 하다가 화면에 각종 멀티미디어 자료를 띄워주자 학생들은 일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각 방송사나 유튜브에 올라있는 8,90년대 뉴스 화면을 보면서는 모두들 뒤집어졌다.
- 저게 우리나라에요? 왜 저렇게 촌스러웠어요?
아키비스트의 발표 자료를 보는 내내 아라는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떠올렸다. ‘과거와 현재가 이만큼 달라졌다는 건 앞으로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거다. 기록을 해야 잊지 않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 여기 야구 좋아하는 친구 있어요? 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고 해요. 각 선수의 모든 활동이 숫자로 기록되고 관리되죠. 얼핏 보면 그저 숫자일 뿐이지만 한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또 선수 생활 전체를 놓고 보면 거기서 어떤 움직임이나 패턴이 보여요. 좋은 선수 나쁜 선수가 갈리기도 하고, 야구 역사상 처음 보는 기록이 탄생하기도 하죠. 각각의 데이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데이터가 모이고 그 사이에서 상관성을 찾아내면 의미가 생기고 지식이 되는 거랍니다. 기록도 마찬가지예요. 기록이 만들어지는 당시에는 별 의미가 없어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모든 기록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생깁니다. 그걸 바탕으로 인류는 전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 것이고요. 그러니 여러분도 일상을 열심히 기록해보세요. 또 알아요? 여러분이 쓴 일기나 SNS 글들이 나중에 책으로 발간되어 교과서에 실릴지도 모르잖아요.
문득 아라는 안네가 등장했던 꿈을 떠올렸다.
절벽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안네가 아라에게 말했다.
- 하늘 참 아름답다. 다락방에 갇혀 살 때는 하늘을 볼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그런가 난 하늘만 보면 눈물이 나더라. 이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문자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내 글 솜씨가 부족해서겠지. 사진이나 동영상이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걸 일기장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안네의 안타까움이 아라에게 전해졌다. 어떻게 하면 안네를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아라는 갑자기 주머니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스마트폰과 똑같이 생긴 전화기가 손에 잡혔다. 아라는 미소를 지으며 안네에게 말을 걸었다.
- 이거 가져.
스마트폰을 건네준 아라는 안네가 인스타그램 계정 만드는 걸 도와주었다.
- 이 버튼 눌러서 사진을 찍으면 돼. 글은 너무 길게 쓰지 마. 길어봤자 아무도 안 읽어. 대신 태그는 재치 있게 달면 좋아. 어떤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본문에 안 쓰고 재미있는 표현으로 태그에 넣기도 하지.
이때부터 아라가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안네는 파란 하늘과 구름을 찍고 또 찍었다. 그리고 안네의 신나는 모습을 아라는 눈동자에 차곡차곡 담고 있었다. 안네가 다락방 생활을 SNS에 올리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아라는 꿈에서 깼다.
6. 나의 기록
해질 무렵, 아라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와서 책가방을 현관 앞에 던졌다. 텅 빈 집이 늘 그렇듯 냉장고 작동음 이외에는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아라는 무언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와 단둘이 지내던 안방,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던 거실 소파, 한때 할머니의 방이었다가 이젠 해온 언니에게 내어준 문간방까지 시간이 흐르며 쌓인 이야기들이 공간을 빽빽히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방으로 다가가자 문기둥에 새겨진 흠집들이 보였다. 엄마와 살 때 생일마다 키를 쟀던 자국이다. 시간이 지나며 다른 흠집들이 덧입혀져서 매년 키 옆에 적어둔 날짜는 거의 읽을 수 없었지만 아라만은 뚜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살, 세 살, 네 살…. 학교에 들어가던 일곱 살, 처음으로 반장을 했던 여덟 살. 아라가 다시 문지방 위에 서서 자신의 키를 쟀다. 엄마가 돌아가신 여덟 살 이후로 한 뼘 넘게 자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나 그 앞에 서 있었을까. 고개를 들어보니 아라 키보다 한 뼘 더 높은 곳에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보니 엄마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라 키보다는 훨씬 높은 곳이라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닳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었나 보다. 어릴 땐 목이 아프게 엄마를 바라봤는데 이젠 고개만 들면 눈을 마주칠 높이다. 그제서야 아라가 엄마와 함께 집에서 보내던 시간이 왈칵 쏟아졌다. 아마 아라와 할머니가 이사를 가거나 문틀을 바꿨다면 절대 알 수 없던 기억들. 순간 아라는 결심했다.
-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사라질 이야기들. 하지만 소중하고 의미있는 이야기들. 도와주실 거죠, 엄마?
참고하면 좋을 자료
- MBC아카이브 : https://www.mbcarchive.com
- 서울역사박물관 - 광화문의 촛불과 함성 전시회 : http://www.cgcm.go.kr/CHM_HOME/jsp/MM03/vr/85/index.html
- 미디어몽구 영상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전시 : http://www.kpenews.com/Board.aspx?BoardNo=9738&Page=1&OrderType=&Cate1=&Cate2=&Cate3=&Cate4=&Text=&ViewMode=PC
- 서울시 소리 아카이빙 전시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quartz2&logNo=221164551628
- 잊힐 권리 : http://story.visualdive.co.kr/2015/05/잊혀질-권리 / https://namu.wiki/w/잊힐%20권리
- 구글 검색 결과 삭제 요청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2/28/0200000000AKR20180228080500009.HTML
- 자기 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 http://www.seoulnpocenter.kr/bbs/board.php?bo_table=npo_aca&wr_id=2384&sfl=wr_4&stx=정보삭제
http://cyberbureau.police.go.kr/crime/sub6.jsp?mid=010600
- 스냅챗 자동 폭파 기능 :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7081102101851607001
- 웹사이트 돌아보기 방법 : https://namu.wiki/w/archive.is / https://ko.wikipedia.org/wiki/위키백과:웹사이트_보존하기
- 웨이백 머신. 타임머신 사이트 : http://web.archive.org / 아카이브.is : https://archive.is
- 부모와 자식의 게임 속 만남. 게임 속 고스트 사례 : https://www.roadandtrack.com/car-culture/videos/a28918/player-two-short-film/